• 최종편집 2024-05-06(월)
 
평택문화원 소장사료로 본 평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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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이란 명칭은 원래 관직을 문반 또는 무반으로 나눈 데서 비롯된 말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양반은 전·현직 관료뿐 아니라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보유한 자들과 가족들을 모두 포함하는 계층으로 이해됐다.
 
 양반에 대한 법적 기준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열·환족·훈족 등과 같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양반들은 물론 향반처럼 지역사회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는 양반들, 그리고 법적 신분은 유지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몰락한 잔반까지 다양한 세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반으로써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급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으며, 이러한 과거 급제자 명단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바로 사마방목이다.
 
 고종 17(1880, 경진년)에 치러진 생원진사 증광시(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치는 시험) 급제 명단인 숭정기원후오경진증광별시사마방목을 보면 과거에 급제한 평택인을 확인할 수 있다. 생원시 3129(159/167)로 급제한 방주민(方周民)의 거주지가 평택으로 되어 있어 평택인의 급제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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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주민의 이력사항을 살펴보면 자는 경렬(敬烈), 본관은 온양이며, 기사년(1809)에 출생하여 급제했을 때 나이는 72세였다. 아버지는 동몽교관(향교에서 교육을 맡아보던 훈도)을 지낸 방시중이며, 팽성읍 원정리의 온양방씨 집성촌이 있어 원정리에서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관직에 오른 기록은 없는데 이는 고령의 나이로 합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평택지역의 과거급제자의 추이를 살펴보면 16세기에 처음으로 과거급제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17세기 전반까지는 큰 변화가 없다가 왜란과 호란이 끝난 뒤인 17세기 후반에 수가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18세기 전반을 지나면서 수가 줄었다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까지는 급제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는 이인좌의 난에 평택지역 양반들이 다수 연루됐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황수근 학예연구사는 수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평택교육지원청 우리고장 평택시 교재 감수위원을 지냈으며, 지난 2011년부터 평택문화원 평택향토사연구소에 재직하고 있다. 현재 안전행정부 산하 국가기록원 민간기록조사위원,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평택시사> 집필에 참여한 황 연구사는 본보에 30회에 걸쳐 평택문화원 소장사료로 본 평택이야기를 시민, 독자여러분에게 알기 쉽게 연재할 예정입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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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이야기] ‘숭정기원후오경진증광별시사마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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