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간추리자면, 고산지대의 서늘한 숲속에서만 자라나는데 어릴 적엔 황록색, 한창 때는 갈색, 늘그막엔 은빛으로 변하는 소나뭇과의 침엽교목. 해설을 듣자니 짐짓 앙상한 가지가 궁금했다. 다가가 유심히 살펴본즉 여느 고사목과는 달리 껍질이 퍽 고운데다 치장한 매무새가 흡사 대왕대비 같아서 절로 옷깃이 여며졌다. 돌아서며, 그 키다리 상록수를 다시금 쳐다보니 늦가을에 따낼 녹갈색 열매들이 눈앞에 선연하다. 하지만 빠른 시일에 각종 오염치를 획기적으로 줄이지 못한다면 그 우아한 자태인들 얼마나 가겠는가? 구상나무의 고고한 맵시를 완상할 날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하니 서글픔을 넘어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상봉(上峰) 직전의 고지대. 소담스런 진달래꽃들과 더불어 주목이 어우러진 기슭을 벗어나니 어느새 산정이 빤히 올려다 뵈는 지점이었다. 역시나 우려스런 바는 출발지가 영실코스가 아니어서 오백나한(五百羅漢)이나 병풍바위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거기 또한 하루가 다르게 부식을 더해간다는 전언(傳言). 가도 가도 기기묘묘한 돌비의 행렬이요, 신묘막측(神妙莫測)한 조각품의 전시장이다. 우리 겨레의 고귀한 자산이 세계자연유산에 걸맞게 세세토록 이어지면 좋으련만…….

  드디어 정상이다. 에누리 없는 해발 1,950미터. 흐르는 땀에 절어 습기 어린 시계를 보니 정오에서 불과 촌각이 모자란다. 점심때가 되어서야 목적지에 다다른 터. “아, ‘백록담(白鹿潭)’이 너로구나!” 전설에 따르면 뭇 신선이 이 연못에서 흰 사슴한테 물을 먹였다고도 하고, 그 옛날 선인들이 흰 사슴뿔로 술을 빚었다고도 하는 데서 유래한 분화구와 마주한 참이다. 어림잡아 움푹 패여 들어간 둘레가 대략 1,700여 미터, 깊이가 100여 미터에 이르는 웅덩이. 일테면 산방산을 제금내고 큼지막한 담수호로 다시 태어났건만, 안타깝게도 그 맑은 청정수는 어디다 두고 이처럼 궁상맞게 길벗을 맞는단 말이냐? 한 움큼 밑바닥에 고인 흙탕물로 도대체 무슨 명주를 빚을 요량인가 말이다.

  어쨌거나 감개가 무량하다. 연약한 내 깜냥에 어찌나 고달팠는지 미처 배고픈 줄도 모르겠다. 하긴 내게 가장 시급한 일일랑 한 장의 멋진 사진. 구도를 잡으며 겹겹이 사방을 둘러싼 쌍곡선을 내려다보니 멀리 검푸른 대양과 어우러진 여럿 사화산들이 왕릉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눈앞에 펼쳐진 ‘왕관릉’과 ‘삼각봉’을 응시하며 굳이 절경이라고 감탄하기도 전 나도 모르게 장엄한 풍광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게 감격에 겨워 얼마큼 산정을 딛고 서있으려니 거짓말처럼 근심의 한기가 양 겨드랑이에 스리슬쩍 끼어든다.

  그리던 꼭대기에 올랐으니 아쉬워도 내려가야 한다. 제아무리 힘겹다한들 오르막만한 내리막이 있을까했던 안도감은 이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니 너덜겅에 너덜밭에 서서 잔뜩 풀죽은 구상나무를 보니 되레 더 버겁게 느껴진다. 계곡물이 바짝 말라버린 데다가 길목에 엉켜있는 잡풀들 때문에 힘겹기가 오를 때나 매한가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따가운 땡볕이 줄곧 정수리를 할퀴듯 내리쬔다. 일행을 보니 하나같이 울상들. 그나마 위안을 삼는 건 옛적 면암이 만났던 고운 수단화에 화려한 철쭉꽃의 보송보송한 몽우리들뿐이다.

  ‘구린굴’을 지나, 지는 해님을 등지고 얼마를 더 내려왔을까. 저만치 허름한 가옥이 어렴풋이 뵈더니만 널찍한 와상이 와락 눈동자 안으로 빨려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가가 털버덕 걸터앉는 동료들. 늦은 여섯 시를 좀 넘긴 시각에 마지막 둘이 한쪽 다리를 끌다시피 나타났다. 죽자사자, 한 발 두 발 걸음을 옮긴 끝에 마침내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온종일 시들한 수풀에 파묻혀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었으나 저마다 해냈다는 성취감만은 선뜻 양보하고 싶지 않은 눈빛들이다.

  이로써 초보 산행자의 등력(登歷) 하나가 추보(趨步)로 쌓인 셈이다. 비록 소동파가 누린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경지에는 못 미쳤을망정 내 딴엔 적벽의 언저리까지는 오른 기분이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문득 오래 전 가르쳤던 면암의 글제를 떠올렸다. 이르기를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그렇다면 나의 ‘한라산행록’을 일컬어 감히 “등한라산기(登漢拏山記)”라고 해두렷다. 의분을 품은 구한말 선비야 애최 준마로 올랐으되, 고삐 대신 교편을 쥔 나는 어설프나마 탐라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맛보았으니 그로 족하리라.

  철모르는 하룻강아지의 치기(稚氣). 결단코 만만한 뫼가 아니었음에도 솔직히 등고자비(登高自卑)의 끈을 풀고 덤벼든 게 사실이다. 자고이래 인자(仁者)는 요산(樂山)이요, 덕자(德者)는 애산(愛山)이며, 용자(勇者)는 호산(好山)이라고 하였거늘, 혹여 나란 사람은 급한 성정으로 스스로를 다그치지는 않았는지 부끄럽다. 뒤돌아보매 거대한 대자연 앞에 선 인간이야말로 뛰어봐야 벼룩인 것을!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307호)부터 '베트남 기행'이 7회에 걸쳐 연재되며, '1회, 호치민의 첫인상'이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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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등한라산기(登漢拏山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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