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 문화재명: 평택원정리봉수대 (平澤遠井里熢燧臺)
- 시대: 조선시대
- 지정번호: 평택시향토유적 제1호
- 지정일자: 1986년 3월 5일
- 소재지: 포승면 원정리 109-54
- 소유자: 평택시
- 관리자: 평택시
- 시대: 고려~조선

■ 평택시의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
 
 평택 원정리 봉수대는 포승면 원정리의 해발 83m인 나지막한 구릉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제5거 연변봉수 직봉노선의 봉수로서 시대를 달리하여 ‘괴태길곶봉수’로 불리웠었고, 현재는 행정구역명에 따라 ‘원정리봉수대’라고 지칭한다.

 봉수제의 기원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하며 본래의 설치목적은 군사적 목적인 통신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생겨난 제도이다. 한국에서는 고대의 삼국시대에도 당의 영향을 받아 원시적인 형태로 활용되어졌다. 그러나 관련기록은 극히 단편적이고 그 유지(遺址)가 멸실되어 오늘날 당시 봉수제의 전모를 파악하기가 극히 어려운 상황이다. 고려시대의 봉수제는 어떠한 형태로든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던 봉수를 활용하고 유지하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역시나 극히 단편적인 기록만이 전할 뿐이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 봉수제는 이전시기와는 달리 좀 더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당시 변경뿐만 아니라, 해안을 통해 침입하려는 외적의 긴급한 상황을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을 통해 최종 중앙으로 신호를 전달하도록 하였던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5거제의 봉수제(전국은 경흥·동래·강계·의주·순천의 5개 봉수대 기점으로 하였음)가 비로써 이때에 성립되었다.

 전 서울 목멱산(남산)의 제1봉에서 제5봉의 봉수대로 집결되었는데, 제1봉의 봉수대는 함경·강원도에서 오는 봉수를 양주 아차산(서울 강동구) 봉수대로부터, 제2봉 봉수대는 경상도에서 오는 봉수를 광주 천림산 봉수대로부터, 제3봉 봉수대는 평안·황해도에서 오는 봉수를 무악산 동봉의 봉수대로부터, 제4봉 봉수대는 평안·황해도의 해안에서 오는 봉수를 무악산 서봉의 봉수대로부터, 제5봉 봉수대는 전라·충청도에서 오는 봉수를 양천(서울 양천구) 개화산 봉수대로부터 각기 받았다. 이와 같이 전국에서 올라온 봉수의 정보는 목멱산 봉수대의 오원이 병조에 종합보고하면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고종31년(1894) 봉수제도가 현대적 전화통신체제로 바뀌어 폐지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봉수대는 지방기념물로 지정하여 각 도·시에서 보호하고 있는데, 원정리 봉수대는 평택시의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 화성시 우정면 화산리 흥천산봉수로 신호 보내

 원정리봉수대의 기록을 찾아보자면 조선초기 《세종실록》의 지리지에 남쪽으로 면천 명해산, 북쪽으로 수원 흥천산에 응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기록이 작성된 조선 초기에는 행정구역상 양성현에 속하였으며, 설치시기는 고려시대에 설치되어 조선 전시기에 걸쳐 운영되었던 봉수라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양성현의 산천 조에서 괴태길곶이 현 서쪽 100리 지점에 있으며 줄 같은 한 가닥 길이 진위현의 송장, 수원 양간을 지나서 바다에 불쑥 들어 갔는데, 무릇 75리이며 목장이 있다고 하였다. 《경기지》의 〈양성현읍지〉(1842~43) 봉수조에는 괴태길곶봉수가 현의 서쪽 100리 괴태산에 소재하여 남쪽으로 충청도 면천 창택산봉수와 직산 망해산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수원 흥천산봉수에 응한다고 하였다. 끝으로 《증보문헌비고》(1908)에는 제5거노선의 봉수로서 직봉과 간봉이 합쳐지는 지점에 위치하였던 봉수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원정리봉수대는 남쪽으로 아산만과 남쪽으로 남양만을 조망하는 가장 앞에 있는 연변봉수로서 조선 초기 남쪽의 면천 명해산봉수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 화성시 우정면 화산리 흥천산봉수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중기에는 간봉인 면천 창택산봉수와 직봉인 직산 망해산봉수가 이곳에서 합쳐져 다시 화성 흥천산봉수로 신호를 보내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북쪽으로 흥천산봉수와는 6.75km의 거리에 있다.

 봉수대는 정상에서 약 2m높이의 동서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세장방형의 평면형태로 석축으로 된 500평가량의 평지가 있으며 현재 석축은 부분적으로 훼손된 상태이다. 단면형태는 상단지대와 하단지대를 갖춘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 모양이 한자의 철(凸)자 형태를 띠고 있다. 둘레의 길이는 하단대지가 239m, 상단대지가 138m이며, 하단은 토축(土築)으로 상단은 석축(石築)으로 쌓았다. 넓이는 하단이 1,700㎡이며, 상단이 700㎡이다. 내부 시설로는 봉돈으로 추정되는 원형 돌무지 4개소, 건물지 1개소, 출입시설 3개소가 있다. 봉돈 추정 원형 돌무지는 지름이 3.5m, 높이 0.3m의 크기이다. 규모면에서 토축 하단대지 둘레가 239m는 유례가 드문 초대형이다. 봉수대 북쪽 100m아래는 봉화수의 주거지와 샘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나 잡초가 우거져 있어 그 흔적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 자료출처: 평택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정리 김선우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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