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사랑하는 부부가 바라보는 산정 호수. 해발 700m에 위치한 칼데라는 흡사 백두산 천지를 빼닮았다. 1년 내내 연평균 기온이 20~25℃를 유지해 사계절 인파가 이처럼 끊이질 않는단다. 몇 장면 추억을 담아 내려가는 길. 내리막 역시 오르막만큼 만만치 않았다. 마부는 잔뜩 화난 내 얼굴을 알아봤는지 말을 조심조심 몬다. 그런데도 자꾸만 앞지르려는 버르장머리를 다 버리지는 못했다. 아까보다는 한결 낫게 안착했건만 불쾌한 기운은 좀체 가시지를 않았다. 팁을 꺼내며 출발 전 진행자에게 배운 따갈로그어를 떠올리려니 머릿속이 하얬다. 슬쩍 수첩을 펴들고 “살리마뽀(고맙소)”라고 인사(‘마마야’=‘기다려’라는 뜻도 적었음)를 건네니 미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지만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면 안 되겠기에 책임자에게 몇몇 건의사항을 묶어 실상을 알렸다. 그는 정색하며 알았다고 접수했으되 길바닥에 구르는 돌멩이들을 언제 치울 거며, 불쌍한 나귀한테 과연 충분한 영양공급을 할는지는 도통 모를 일이다. 앉기 편한 안장과 나귀의 목욕일랑 아예 말도 못 꺼냈다. 아무튼 보다 쾌적한 관광을 위해 손님을 괴롭히는 요소는 제발 재빨리 고쳤으면 좋겠다.

  이들이 아끼는 따알화산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원추형 화산. 주변 풍광이 뛰어나고 아직도 활동하는 미니화산의 모습이 신기해서인지 필리핀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지로도 각광받는 곳이란다. 아주 오래 전 화산이 폭발한 뒤 이처럼 길이 25km, 폭 18km에 달하는 호수가 형성됐고, 1977년 다시금 폭발이 일어나 이처럼 분화구 안에 작은 분화구가 생겨났다고 전한다. 그에 힘입어 이런 이중 화산이야말로 세상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독특한 볼거리라고 목청을 높였다. 사실 직접 말을 타고 올라갈 때는 호수가 토해내는 매캐한 연기를 기대했는데 활화산에서 내뿜는 특유의 냄새는 맡지 못했다. 실제 이 주변에 필리핀의 전 대통령 마르코스가 별장으로 이용한 ‘피플스탁’이 있단다. 거기서 푸짐하게 차린 쌈밥을 먹었다. 다양한 상추쌈에 현지 양념으로 버무린 돼지고기는 괜찮았지만 기름에 튀긴 블루길은 차라리 손대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다. 이네들의 경우 유난히 닭고기를 좋아해 닭이 사람보다 많다는데 실제 밥상에는 오르지 않았고 육우가 아닌 물소를 키워 우유는 나지 않는단다.

  이색적인 트레킹 체험. 돌이켜보니 돌처럼 딱딱한 나무안장에 앉아 가파른 길을 무리하게 치받는 바람에 미쳐 엉덩이가 까진 줄도 몰랐다. 게다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뒤집어쓴 흙먼지를 씻으려 부랴부랴 화장실을 찾았으나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하릴없이 별 쓸모없는 뒷간을 뒤로하고 호숫가로 내려가 비릿한 민물냄새를 참아가며 겨우 손바닥만 닦아야했다. 이걸 두고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라니 그 황당함이란? 뒤늦게 알아낸 ‘따가이따이’의 뜻은 생뚱맞게도 “아버지에게 건배를!”이란다. 어쨌든 똑같은 코스를 돌고도 느끼는 소회는 천양지차, 어딜 가든 여행을 통해 얻는 개인차는 뚜렷하다. 따가이따이는 필시 마닐라와는 색다른 색깔과 향기를 지녔다. 필자의 지론인즉 어느 곳이든 적어도 한 번의 방문은 필요하다고 여기는 이유다. 곁들여 바지런히 기록을 남기고 틈틈이 질문을 던져 상식을 넓힌다면 비단 위에 꽃이리라. 역순으로 향하다가 만난 건 고급주택가의 철조망 담장. 여기가 바로 마르코스 일가의 별장이었단다. 물론 내부는 들여다볼 수 없었다. 차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단 한 동의 빌딩이 서있었다. 얼른 작다란 팻말을 보니 필리핀주립대학. 모름지기 대학의 경쟁력 또한 국력과 비례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길가에 늘어선 지프니를 대하면 미국산의 찌꺼기를 접하는 듯하다. 거기다 곳곳에 박혀있는 스페인의 잔재들을 더할라치면 두드러진 정체성이 있을 리 없다. 어쩌다 방치된 습지가 있다싶으면 어김없이 죽어가는 갈대가 나온다. 지지부진한 도로공사만 해도 벌써 4년째란다. 웃기는 일은 이네들이 속전속결을 지향하는 한국을 보고 손가락질을 한다는 사실. 가이드를 향해 그러니까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지 않느냐고 일침을 가하더란다. 그 가운데 건재한 간판을 보니 NISSAN GENUME PARTNER CENTRE. 일본의 끈질긴 공략은 예서도 시들 줄 모른다. 정교한 기획과 친절에 관한 한 따를 자가 없기에. 번듯한 회사를 지나쳐 그나마 푸르른 벼논을 본 건 일종의 위안이었다. 잎사귀 큰 나무가 늘어선 가로를 따라 내달린 끝에 톨게이트를 벗어나니 마닐라 시내. 조금 쓸 만한 건물에는 어김없이 무장 경관이 상주하고, 열대를 상징하는 야자수의 행렬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노점상 중에는 담배를 낱개로 파는 이들도 있다. 그렇게 마닐라를 보고프던 나의 바람이 그럭저럭 무르익는 중이었다.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299호)에는 '필리핀 기행: 팍상한폭포' 편이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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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필리핀 기행 '칼데라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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