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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를 위한 변증 ‘믿음으로 사랑을 소망함’ (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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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주요 덕목 가운데 첫째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단순히 자선이나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마음이나 애정이 절로 생기기보다는 미워하는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난제입니다. 설령 내가 선천적으로 냉정한 기질을 가졌다고 해서 사랑을 배워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는 건 아닙니다. 일단 그냥 그를 사랑한다고 치고 행동해보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그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느끼는 만족감과 기쁨은 그야말로 비밀입니다. 똑같은 영적 법칙이 정반대 방향으로 무섭게 치닫기도 합니다. 독일인의 유대인 학살은 그래서 벌어진 일입니다. 선과 악은 모두 복리로 증가한답니다. 기독교의 첫사랑은 지정의의 문제입니다.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38) 라는 계명에 순종하십시오. 사랑은 우리의 죄나 무관심을 지치게 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신학적 덕목 가운데 소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인류사를 훑어보면 바로 다음 세상을 위해 유의미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은 선한 믿음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이상을 생각지 않으면서부터 기독교의 영향력은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수 있거늘 반대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둘 다 잃어버리는 법칙입니다. 이제 우리는 현재의 문명 이상을 소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상에서 천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못하는 것은 그에 관한 훈련을 받지 못해서입니다. 우리가 받은 교육은 거의가 세상에 마음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천국을 염두에 둘 때조차 미처 그걸 깨닫지 못하고 흘려버릴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끝내 공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절대 공간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예 그 공간의 존재를 무시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환경을 탓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게 환상일 뿐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거듭난 기독교들은 하늘나라를 이룩하고자 자신의 목표를 바꾸는 자들입니다.
▲ 부락산 일대에서 만난 풍경화
믿음은 성경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그러나 이성을 거치지 않은 믿음은 사상누각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정작 믿음을 무너뜨리는 주범은 상상력과 감정입니다. 믿음과 이성이 한편이 되고 감정과 상상력이 다른 편이 되어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고로 믿음은 단순히 누군가의 신념을 바꾸라는 제안이나 설득이 아닙니다. 치열한 추론을 거쳐 자기 확신이 들 때 고수하는 기술입니다. 믿음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 훈련해야 합니다. 첫 단계는 사람의 기분은 바뀌기 마련이므로 지속적인 지도와 말씀 공부가 필수입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는 데도 점점 자라나는 신앙은 없습니다. 둘째 단계는 차원을 높여 기독교의 덕목들을 실천해보는 진지한 시도입니다. 일주일 이상의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선행을 위한 집요한 노력을 해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알기 어렵습니다. 포기하고픈 유혹과 맞서 싸워보지 않은 사람은 유혹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모릅니다. 사악한 충동을 물리쳤을 때라야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속속들이 아실뿐더러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는 순간부터 우리의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이쯤에서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독교 서적을 읽다가 이해할 수 없는 게 나오면 그냥 넘어가십시오. 시간이 지난 뒤 자연스레 의문이 풀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선행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관심사는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갈수록 나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맡기는 상태로 변화해가는 일이 관건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상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일입니다. 그것이 신행일치의 삶을 실천하는 데까지 이르는 길입니다. 굳건한 믿음으로부터 선한 행동이 나옵니다. 이 원리를 두고 이와 같은 패러디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오직 사랑이라고? 그 사랑은 돈이라고?”라고 말입니다. 심지어는 “오직 믿음이라고? 믿음만 있으면 무슨 짓이든 상관없다고?” 비아냥대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 2:12-13)라는 진리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73호)에는 ‘기독교를 위한 변증 - 삼위의 하나님을 신뢰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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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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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를 위한 변증 ‘정결한 결혼관을 규정함’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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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리스도인의 순결에 대해서 다룰 차례입니다. 성도덕은 기본적으로 옷차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규범은 결혼해서 배우자에게 충실하든지, 독신으로 금욕하든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요지는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본성을 제어하는 일에서 기독교의 원칙을 따르는 데는 절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자가 완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참고로 심리학에서는 억압된 성적 욕망이 위험하다고 가르칩니다. 기독교에서 결혼을 권장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육체가 짓는 죄보다 더 나쁜 건 영적 쾌락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고 즐거워하는 것, 남을 자기 맘대로 휘두르는 것, 남의 흥을 깨뜨리고 좋아하는 것, 남의 험담을 즐기는 것, 권력을 탐닉하는 것, 증오를 부추기며 기뻐하는 일 등이 그것입니다. 동물적 자아와 악마적 자아를 즐기는 자들이 거리의 매춘부보다 지옥행에 더 가까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결혼관에서는 부부를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결혼에 대한 열쇠와 자물쇠의 비유는 적절해 보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배우자의 간음을 제외하면 이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결혼식장에서 서약한 것에 대한 무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순결을 논하기에 앞서 정직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상대를 향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책임이요 정의라는 규정입니다. 사랑하면서 느끼는 황홀한 감정은 여러 가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토대일 수는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감정이 늘 지속 가능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남편을 가정의 머리(에베소서 5:22-24)라고 합니다. 부부가 동등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가정에도 일정한 순서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강력한 사랑을 바탕으로 가족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수호할 최후 결정권을 행사하는 데 따른 부득이한 순위입니다.
▲ 부락산 일대에서 만난 풍경화
기독교의 규범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원수까지 용서해야 하는 쉽지 않은 상황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 한복판에서 다시금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태복음 6:11)라는 말씀까지 맞닥뜨리면서 떠오른 말은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필자의 경우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 고민을 거듭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 자격이 있기에 나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나 자신에게서 발견된 비겁함, 자만심, 탐욕까지 무작정 덮어주면서 말입니다. 기실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한다는 것은 오롯이 증오의 세계에 갇히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지니라”(출애굽기 20:13)라는 말씀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전쟁터에 나간 기독교인 병사가 총으로 상대를 무찌르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는 적의나 복수심을 물리치라는 충고입니다. 전혀 사랑할 구석이라곤 없는 자들까지 사랑한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사랑할 만한 모습이 아닌데도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단지 그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로울 수 없는 죄악 중에 교만과 자만이 있습니다. 천사도 교만으로 인하여 악마가 되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맞서는 일입니다. 교만한 자에게 불쾌감을 느끼는 것도 알고 보면 자기 안에 교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남과의 비교에서 옵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권력이야말로 교만한 자들을 좋아합니다. 교만은 필연적으로 적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교만한 자가 믿는 하나님은 상상 속의 신을 만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교만은 영적인 데서 비롯되니까요. 교만을 통해 온갖 유혹을 극복하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교만은 영적인 암으로써 악마가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다만 타당한 칭찬을 듣고 즐거워하는 일은 습관적이 아닌 한 교만은 아닙니다. 교만한 자들일수록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입에 발린 목소리로 자신을 부족한 사람으로 포장하는 경우를 조심해야 합니다. 겸손해지고 싶다면 자신이 어딘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72호)에는 ‘기독교를 위한 변증 - 믿음으로 사랑을 소망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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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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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를 위한 변증 ‘도덕률로 선악을 분별함’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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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자가 어느 초등생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고 물으니, “누가 재밌게 지내나 맨날 감시하다가 결국은 훼방을 놓는 분”이라고 하더랍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오늘날 영국의 영적 상태를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무신론자가 부쩍 늘었다더니 어느새 자라나는 세대에까지 암처럼 전이되었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도덕 규칙이란 인간이라는 조직체를 잘 움직이게 만드는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따금 고장난 물체가 생기는 겁니다. 서로 충돌하거나 내부에 문제가 생겨 공동체에 해를 입히는 일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할 때 사회적 관계부터 점검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이타심이 사라지면 큰일이 나는 까닭입니다. 종교는 거기에 기여하는 역할을 통해 인간과 인간을 있게 한 보이지 않는 힘과의 관계를 연결합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에서는 영원한 세계를 실제처럼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죽음이니까요. 이제 영생은 참 아니면 거짓,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오래된 분류 체계에 따르면 도덕에는 일곱 가지 덕목이 있습니다. 그중 네 가지는 기본 덕목이고, 나머지 세 가지는 신학적 덕목이라고 합니다. 전자는 문명인이라면 쉽사리 인정하는 것들이지만 후자는 그리스도인들만 아는 것들입니다. 기본 덕목부터 차례로 살펴보면 분별력이란 실생활에 적용되는 양식으로써 자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으며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입니다. 절제란 무엇이든 적절한 정도까지만 하고 멈출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정의는 전통적으로 공정함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으로써 여기에는 정직, 성실, 약속 이행 등이 들어갑니다. 마지막 꿋꿋함에는 고통 속에서 버티는 용기와 위험에 맞서는 용기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덕목은 무엇일까요? 기본 덕목에 더해 특정한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거듭난 사람만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 부락산 일대에서 만난 풍경화
하지만 기독교의 덕목이 단지 도덕적인 가치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황금률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실천적인 교인들 전체가 나서야 합니다. 위에서 제시한 황금률을 많은 이들이 받아들인다면 단시일 내에 사회적 문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기독교적인 사회의 모습에 대해 분명한 단서를 제공한 터입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데살로니가후서 3:10)는 지침도 노동 현장의 불문율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독교 사회는 소위 좌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늘 정중해야 합니다. 유쾌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할 의무도 함께 집니다. 어려운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일도 향기롭지 않습니다. 자선은 내 것이 상당 부분 잘려나간 기분이어야 합니다. 그로 인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감수하는 일입니다. 사치와 욕심이 죄가 된다는 것에 민감하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에 한 걸음 다가서는 중입니다. 핵심은 하나님 사랑하기를 배우지 않는 한 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께 순종합니다.
기독교의 도덕은 인간이란 존재를 제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이 말이 정신분석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궁금했을 겁니다. 사실 프로이트의 경우 철학적 요소만 빼면 기독교 도덕과 중복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양한 감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스럽지 못한 감정들을 자꾸 재료로 쓰는 경우입니다. 만약 심리적 재료가 나쁜 것이라면 당장 치료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잘못은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의지적 선택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그가 원재료를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수많은 선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애를 보고 천국의 피조물로 바뀌어 가든지 지옥의 피조물이 되어 가든지 하는 것입니다. 나쁜 행동은 물론 생각으로 짓는 죄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이란 선해질수록 자기 안의 악을 선명히 깨닫는 반면, 악한 사람은 선악조차 분별하지 못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71호)에는 ‘기독교를 위한 변증 - 정결한 결혼관을 규정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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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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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를 위한 변증 ‘무신론의 허구를 반박함’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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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은 한마디로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으면 만사형통이라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무지입니다. 기독교야말로 전혀 단순하지 않습니다. 실제 알고 보면 실재하는 모든 것들은 복잡다단합니다. 예컨대 탁자 하나만 해도 분석해보면 까다롭습니다. 그것에 잠깐만 눈길을 주어도 시신경부터 뇌 활동까지 그야말로 총체적입니다. 더구나 추상적인 현상을 알아듣기 쉽게 해설하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무수한 법칙들이 뒤엉켜 우주 전체를 형성하고 있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은 기독교를 복잡하게 만들었느냐고 따지고 듭니다. 하지만 지구를 비롯한 여러 행성을 바라보아도 태양을 중심으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주기를 따라 움직입니다. 자,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이원론에 대해서도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그들은 영원 전부터 선과 악이 양대 축으로 존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천사는 악마가 되기 전에는 선한 존재였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죄다 오염된 환경으로 인해 후패(朽敗)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무언가 부패했다는 말은 처음에는 신선했다는 얘기니까요. 하나님이 만드신 사물의 원형은 본래는 모두 좋은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믿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첫째는 선한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렇게 악이 기승을 부리느냐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애초에 악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악행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탓입니다. 태초에 인간을 로봇처럼 만들 요량이었다면 굳이 창조하실 까닭이 없으셨겠죠. 누구든지 신이 명령하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인다면 개개인은 벌써 존재할 가치를 상실했을 것입니다. 죄악은 사탄이 인간들에게 가르친 산물일 뿐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제도와 문명을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의 지혜를 보면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니 더는 소망이 없을 때 갑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분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죄에 대한 용서를 외쳤습니다. 스스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미치광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비록 그분을 메시아로 믿지는 않을지언정 무작정 사기꾼이라고 몰아붙이는 광인은 아직 없습니다.
▲ 부락산 일대에서 만난 풍경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직면한 터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수용 여부입니다. 핵심은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원죄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신성과 인성을 지닌 분에게 이 문제를 맡기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진실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중요한 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연결 고리입니다. 하지만 이는 영적인 차원의 문제이기에 더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망의 메시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대전제는 회심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죄에 물든 자아를 버리지 않으면 영생을 누릴 수 없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은혜라는 이름으로 모든 인류에게 값없이 주어졌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각자의 지정의(知情意)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었으므로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고, 참 인간이었으므로 완전히 낮아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의 길을 따르자거나 가르침을 따라 노력하자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에게서 비롯된 생명의 기운이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하자는 새로운 제안입니다. 다만 교파에 따라, 각자의 신앙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습니다. 요체는 넘어졌을 때 일어서는 영적 대처가 관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넘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요점은 회개를 통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데 있고, 내 안에 복음의 씨앗이 살아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영적 생명의 기운이야말로 사람을 무력감에서 탈출하도록 도우니까요. 인간의 태초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유기체적으로 일한다는 의미가 그것입니다. 오래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생각보다는 오래 참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지체하지도 않으십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70호)에는 ‘기독교를 위한 변증 - 도덕률로 선악을 분별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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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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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를 위한 변증 ‘영혼구원의 법칙을 논함’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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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리를 기반으로 한 영혼 구원의 원리는 자명합니다. 연약한 인간에게도 때로는 완벽을 기대하는 이유입니다. 저의 관심은 단지 진리를 찾아보자는 데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불편을 끼치면 안 된다는 의식에서 출발해 보렵니다. 하지만 내가 나쁘다고 말하는 행동이 오히려 나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분별력이 있으므로 정정당당하게 처신하는 것이 사회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는 길이니까요. 물론 개인과 계층과 국가가 서로 공정한 잣대를 행사해야 합니다. 고로 늘 경계할 지점은 이기심입니다. 인간의 행위들 너머에는 아주 명백히 우리를 압박하는 실재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주는 삼위의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니까요. 공간과 시간, 열과 추위, 색깔과 맛,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무한한 지혜로 이루어진 산물입니다. 무신론을 두고 단지 상상력으로 치부해버리는 까닭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논리적 비약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지만 그 어느 종교보다도 상생하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살아 움직이는 우주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첫째는 유물론적 관점입니다. 이는 물질과 공간이 우연히 생겨났다는 시각으로 심지어는 생명체까지도 어느 날 화학물질과 적절한 온도가 마련되고 결합함으로써 점점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로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 관점으로 광대무변한 우주의 배후에는 정신세계와 비슷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곧 우주는 분명히 초월자에 의해 정해진 목적을 위해 설계되었을 거라는 믿음입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실험이 거의 불가능해도 필자로서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 물리적 상식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우주에 관한 비밀이 밝혀진다고 가정해봅시다. 과연 그 정답이 우연이라는 것으로 귀결될까요? 누구에게나 양심이 해답일 수 있습니다. 성급히 신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섣불리 지난 한 세기 동안에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두고 출몰했던 감언이설들을 끌어오지는 않겠습니다.
▲ 부락산 일대에서 만난 풍경화
우리의 불안은 그래서 발생합니다. 지금쯤 왠지 심기가 불편해지는 분들도 나탈 수 있습니다. 종교 선전에 불과한 내용을 철학처럼 교묘히 포장하지 말라고 항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문제 제기가 시대에 뒤떨어진 공상일까요? 분명한 건 우리는 퇴행적이어서는 고란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세상은 그분이 만든 우주이고, 우리 영혼에 깃들어 있는 도덕적 황금률입니다. 모두가 가치로 여기는 공정한 처신, 이타심, 용기, 신뢰, 정직, 신용으로 표현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니 우리의 잘못에 대해 용서하신다는 말을 건네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라는 말에도 아직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노라면 절대 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잘 설명이 안 되니까요. 내일 당장 사정이 좋아지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곤경이고 공포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세상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이유입니다. 다만 이런 낭패감을 딛고 전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입니다, 현실적 절망을 장래 소망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과 경쟁하는 개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거늬 매일 불거지는 주제는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는가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여러분이 만약 무신론자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은 거대한 착각에 불과해야 합니다. 원저자도 한때는 지독한 무신론자였으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도리어 이전보다 개방적인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온전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일은 다른 종교는 죄다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비교적 정답에 가까운 답지도 있지 않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구원이 있는 종교에는 유사 정답이 없습니다. 애써 과거사까지 소환하여 종교적 다수파와 소수파를 거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는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차원은 아니니까요. 범심론은 가장 위험한 것 중에 으뜸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제 몸을 움직이듯이 우주를 움직이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강변합니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우주 자체를 하나님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위험한 발상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69호)에는 ‘기독교를 위한 변증 - 무신론의 허구를 반박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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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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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를 위한 변증 ‘순전한 기독교를 변론함’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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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널리 알려진 C. S. 루이스의 기독교 교리에 관한 변론입니다. 물론 필자의 견해나 해석으로 가감하기도 할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갈라놓은 문제들은 지극히 신학적이거나 교회사적인 논쟁점이어서 참 전문가가 아니면 섣불리 다룰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논쟁거리들을 놓고 토론을 벌인다고 한들 불신자를 교회 울타리 안으로 이끌어오는 데도 전혀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교파 분열에 대한 토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앞에서만 해야 합니다. 저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전하는 일에 다른 작가들보다 오히려 역량이 모자랍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해 말할 때를 빼고는 마리아에 대해 얘기한 적도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념은 너무 강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신앙을 재단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건드리면 그건 다신론과 다름없습니다. 동정녀를 성모로 추앙하는 문제는 기독교를 망칠 만한 주제니까요. 공개된 장소에서 여러 민감한 논쟁거리에 대하여 일부러 침묵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원저자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을 펼치겠다고 선언합니다. 정작 중요한 본질은 신구약 성경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제가 공동기도서를 각 교파에 보내 자문을 구했습니다. 최대공약수를 추출하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최소한 신학자들의 증오심을 부추기지는 않습니다. 저는 모든 죄의 유혹을 죄다 받는 이는 극히 드물다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따지듯 묻곤 합니다. “대체 당신이 뭐라고, 누구는 그리스도인이고 누구는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어떤 교리를 믿지 않더라도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에 훨씬 가깝게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리스도인의 영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럴수록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분들을 위하여 성의껏 기도해야 합니다. 설령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원수라고 해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셨으며, 예수님 외에는 구원을 받는 다른 길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심오한 뜻에서 제가 쉬이 입을 열지 않는 이유입니다.
▲ 부락산 일대에서 만난 풍경화
먼저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부터 풀어보려고 합니다. 목하 인간 본성의 원리에 접근하는 중입니다. 뿌리 깊은 죄성에 의해 움직이는 원초적 심성은 사실 만유인력의 법칙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도 하나의 유기체로서 다양한 생물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유한 영혼을 가진 인간의 경우에도 자연법을 거스르지는 못합니다. 지금 제가 하고픈 말은 올바른 행동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사안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게 아닙니다. 기실 자연법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니와 국가 간에 체결한 조약마저 나중에라도 불공정하다는 이유로 파기해버리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에 대한 병명이거나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시도여서는 안 됩니다. 그 하나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내지는 기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방식으로는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들 자연법을 익히 알고 있으니까요.
응당 몇 가지 반론이 가능합니다. 가령 도덕률이란 것도 집단 본능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역시 사회적 통념에 따라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강렬한 바람이나 욕구를 느낀다는 뜻입니다. 사람이란 어떤 경우에도 자기보존본능을 뛰어넘기 어렵습니다.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느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자 편을 드는 것보다 앞서는 가치는 정의에 속하는 영역입니다. 도덕률이 단순한 본능 중 하나가 아닌 까닭입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충동이 원래부터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었다는 말에는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까지는 그러했으되 적어도 원죄가 유전되면서부터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여기에 사물을 적용하는 문제는 다른 사안입니다. 준법정신을 강조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꼭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적어도 도덕적 진보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어느 사회든지 일정한 행동법칙은 존재해야 한다고 봅니다. 공동체를 위한 도덕률마저 무너져버리면 어떠한 사회적 체제라 할지라도 지속성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68호)에는 ‘기독교를 위한 변증 - 영혼구원의 법칙을 논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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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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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학위과정을 마친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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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을 물러난 뒤 지난날을 헤아려보니 꽤나 진통이 따랐던 세월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만 심신을 눕히고서 편안히 지내도 되지 않느냐는 눈총(?)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마냥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기는 싫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할 일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지역신문에 연재하는 기고문은 여전히 10년을 넘겨 이어가고 있었으니까요. 바쁜 일상에 쫓겨 아직 정리하지 못한 원고를 추슬러서 책을 펴낼 수도 있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한두 해 남짓 미처 밟아보지 못한 국내외 여행지들을 두루 구경하려고 작정했었지요.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구촌을 휩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손발이 꽁꽁 묶이고 만 겁니다. 아들과 함께 막 독일 교육계를 돌아보고 귀국한 직후였습니다.
때마침 눈에 띈 게 박사과정생 모집 문구였습니다. 지체하지 않고 원서를 넣었는데 이미 서울에 당도한 면접생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느닷없이 연기를 통고하는 곳이라면 아무래도 신뢰하기 어려웠습니다. 곧바로 다른 곳에 들어가 당차게 학업을 시작했습니다. 초년생에게 부과되는 과제는 예상치를 뛰어넘을 만치 만만찮았습니다. 무려 20여 년 전 문학박사과정에 입학했다가 지레 멈춰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하루하루 힘은 들었지만 배우는 만큼 보람을 느끼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복병은 늘 내부에 있는 법이라더니 생기 넘치는 학사일정에 방해꾼이 나타났습니다. 어쩌면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사자성어는 사탄이 지어낸 듯합니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감히 종교 다원주의자가 슬그머니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아뿔싸,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강의 담당자였습니다.
고심 끝에 점잖게 그러나 진정성 있는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가당찮게 그의 갑질은 이미 도를 넘고 있었습니다. 깨닫지 못한 원생들을 등에 업고 수준 낮은 짓거리를 일삼더니만 급기야는 학점을 통해 보복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어렵사리 목소리를 듣게 된 총장이란 인물은 말귀마저 어두운 상태였습니다. 부득불 오래전 신대원(M.Div.)을 마친 모교에서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은혜롭게도 학업에는 탄력이 붙어 그동안 미뤄왔던 출간까지 세상의 빛을 보았습니다. 어느새 학위논문을 써서 내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도 걸림돌은 있었습니다. 역시나 다원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렸을뿐더러 전공 교수조차 배정받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필요한 상황에서 때마침 보혜사 성령님은 제게 조언을 구할 만한 귀한 분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일대일 수업으로 학위논문의 감도에 반응할 수 있었으니까요. 미진했지만 5학기에 막 접어들 무렵 일찌감치 초안을 탈고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글은 공들여 캐낸 그대로의 원광석인 셈입니다.
▲ 화단에서 피어난 꽃망울
다만 완성이란 현상은 태생적으로 본질적 물음을 잉태할 수밖에 없나 봅니다. 논제를 거푸 삼세번씩이나 바꿔야 했습니다. 아니 폭을 좁혀 따지자면 그 갑절은 족히 될 겁니다. 감사할 제목은 처음 준비한 원고를 죄다 활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유수의 대학들처럼 입학과 동시에 지도교수를 정하고 학기마다 소논문을 통해 완결을 향해 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모본이 되는 사례를 접하고서도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건 퍽 서글픈 일입니다. 심대한 문제의식을 지녔다면 적절히 문제를 제기해야 옳거니와 날카로운 분석과 서슬 퍼런 비판을 거쳐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순서일 터입니다. 늘 모범사례가 태부족이어서 제자리걸음을 계속하는 게 아니라 실천 의지 자체가 부족한 탓으로 보입니다. 덤처럼 첨부한 소논문은 저의 모자란 행간의 부록입니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도서 1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미리 써둔 글들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도우신 손길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소논문으로 제출한 과제물들이 고스란히 되돌아온 경우니까요. 가멸차게 예비한 자료들을 그대로 묵혀두기 아까워 성경해석 부분을 포함한 논문집을 발간하기로 결정한 이유입니다. 박사학위청구논문을 쓰는 내내 애먹인 각주를 최대한 살려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전하는 특별계시만으로도 영혼구원은 충분하기에 그렇습니다. 까다로운 최종심사까지 통과한 일이야말로 은혜로운 섭리입니다. 삼위의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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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67호)에는 ‘기독교를 위한 변증 - 순전한 기독교를 변론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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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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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미완의 거인을 기리며 ‘문화강국을 꿈꾼 거인’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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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이 견지한 정치적 이념과 사상들의 핵심은 자유였다. 그는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나라는 완전한 자유로움을 구가함으로써 국민 전체의 의견이 반영되는 정치체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일부 당파나 특정 계급의 철학을 무기로 다수를 강제함이 없이 사랑의 덕과 법적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를 건설하자는 갈망이었다. 그는 독선과 아집을 배격한 절제와 질서만이 독재를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변증법이나 유물론은 조선의 사문난적(斯文亂賊)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단정한 것이다. 백범은 자기 하나밖에 모르는 독불장군식의 전제주의가 아닌 모두가 하나되는 조화와 균형을 꿈꾸었다. 젊은 시절 잔혹한 고문을 받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어떤 사안을 막론하고 균형 잡힌 시각과 깊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는 겨레의 선각자답게 방종의 한계가 보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우리나라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 공동체였다. 전 국민의 다양한 생각을 통치에 가감 없이 반영하려면 자유의사에 의한 투표와 부득이한 경우 다수결의 결과가 존중받는 사회여야 한다고 사려한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합의된 절차를 따르는 법도가 중요함을 강조했다. 나아가 신앙과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일부 빗나간 국민성까지도 문화와 교육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자립에 기초한 독립사상을 중시한 이유다. 하느님이 묻는 내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오로지 대한독립이라고 대답한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고의 문화를 건설해야 하고 그런 민족이라야 많은 사람들을 성인(聖人)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름다운 나라는 부력(富力)도 아니고 군사력도 아닌 높은 문화의 힘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의 땅을 침범하기를 원치 않노라고 천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 고덕신도시로 진입하는 길목
김구가 보기에는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이나 경제력이 아니었다. 자연과학의 힘은 강할수록 좋은 것 같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류가 불행한 이유는 인의(仁義)와 사랑이 부족한 게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즉 선의의 마음만 잘 계발하면 현재의 물질로도 전 세계인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으므로 사해동포는 정신을 배양하여 문화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외침이었다. 그는 틈날 때마다 우리나라는 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어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백범이 가리킨 문화의 힘은 모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주성을 가진 창조적 문화에 있었다. 진정한 세계 평화의 도래야말로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늘어나야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서로 화합하는 가운데 신뢰를 쌓아야 하며, 그걸 담보하는 행위가 교육의 꽃을 심는 자유라고 보았다. 남달리 인후지덕(仁厚之德)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앞날을 맘껏 축복하며 젊은 학도들에게 신신당부하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줄곧 문화대국을 이뤄 문화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소원하였다.
백범 선생은 통일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을 통해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현시점에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목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상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할 수 없다.” 그는 남북에 각각 두 개의 정부를 수립하면, 결국 남북이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내전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던 참이다. 이어 미완의 거인 김구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이러한 동기, 이러한 의미에서 실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품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철학의 대강령을 적어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은 이 한 편을 주의하여 읽어주셔서, 저마다의 민족철학을 찾아 세우는 데 참고를 삼고 자극을 삼아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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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66호)에는 ‘학위과정을 마친 소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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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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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미완의 거인을 기리며 ‘김구가 소유한 특장점’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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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은 약소국 신세를 면하려는 의도에서 일부에서나마 이웃 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바라던 자들을 향해서는 대뜸 미친놈이라고 응수했다. 다소 거칠고 모진 말로써 매섭게 일침을 가하고야 마는 모습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한 형제간도 엄연히 위아래가 있거늘 하물며 어찌 피가 다른 남의 나라 사람들과 호형호제하며 탈 없이 지낼 수가 있겠느냐는 반문이자 애당초 불가능한 일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일갈이었다. 우리 겨레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먼저 피를 나눈 동족끼리 화합하는 길이었다. 어찌 내부에서조차 단합하지 못하고 이민족으로부터 예우받기를 바라느냐는 현실 인식이었다. 민족 내부의 굳건한 결속만이 스스로를 지켜내는 첩경이라고 보았다. 그가 지닌 성정(性情)은 비단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불같은 정의로움뿐만 아니라, 일상사와 주변 사회의 생활사에서까지 의로운 일이 아니면 결코 나서는 일이 없었다. 이는 백범이 일찍이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 선생을 만나 교육사업을 펼치면서 평생의 신조처럼 지켜낸 모습에서도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내내 그가 보인 용맹성만 해도 그렇다. 약관에도 못 미친 19세의 나이에 벌써 동학의 팔봉접주가 되고 선봉장이 된 일이며, 김이언이 이끄는 의병 부대에 투신하여 국모 살해의 한을 풀려고 일본군의 특무장교 쓰찌다(土田)를 처단한 일이 이를 증명한다. 나아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도운 일에서 알 수 있듯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는 대담성을 보였다. 사람이란 존재가 흔히들 작심삼일 하기는 쉬워도 일관성을 지키기는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일을 떠맡고 나면 그것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간에 열정을 다해 일로매진하는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범이 책임을 맡아서 착수한 일은 무엇이든지 잘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는 맡은 바 임무를 열성껏 성실하게 완수해내고야 마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 고덕신도시로 진입하는 길목
김구는 불필요한 허례허식을 벗어 던져버리고 실질적 가치를 숭상하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허황한 공리공론이나 탁상공론을 싫어한 만큼 실질적 논의를 통한 실천을 중시하는 유형이었다. 그가 동학, 유학, 불교, 기독교의 여러 종교를 두루 섭렵했음에도 진리의 핵심보다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주고 독립운동을 지원해주는 데 중점적으로 초점을 맞추었을 뿐, 어느 한 종파의 교리에만 지나치게 경도되거나 집착한 일이 없었다. 곧 다원주의자에게 종교적 배타성이 자리 잡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에게는 이른바 목숨을 걸만한 이상이 아니면 과감하게 양보하고 타협하는 포용성이 있었다.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아량을 베풀 줄 아는 그러한 성품이었다. 그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을 대할 때 비록 자기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설득과 연합을 통하여 서로 용납하고 협동했다. 맨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는 외교와 협상의 수완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해와 사랑의 무기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실례를 보여주었다.
가령 1927년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되었을 때 득달같이 민주적인 국무위원제를 추진한 예를 보거나 일제 말기에 좌파 독립운동 단체들과 인물들을 포용하여 좌우 분열을 사전에 막아내는 등 통일정부의 수립을 준비한 일은 그의 포용적 과단성과 관련된 대표적 사건이었다. 백범은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공포한 뒤 좌파 민족 혁명당의 조선의용대를 제1지대로 편입하여 광복군을 통일했으며, 의정원에도 좌파 사회주의 정당과 단체대표들을 야당 의원으로 영입하여 의정원을 통일의회로 개편하였고, 임시정부에 부주석제를 신설하여 좌파 단체들의 대표를 선임하여 끌어안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백범은 광복 후에 역사적인 남북협상을 추진하면서 처음부터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한 것도 이러한 포용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자칫 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못내 씻어내지 못한 것은 국제상황을 너무 고지식하게 판단한 데서 온 근시안적 오류라는 저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그의 포용성에서 비롯된 일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강인한 성품과 특장점을 지닌 백범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그의 사상과 이념적 행보를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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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65호)에는 ‘미완의 거인을 기리며 - 문화강국을 꿈꾼 거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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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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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미완의 거인을 기리며 ‘일제 강점기의 치욕사’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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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난에 찌든 형편인지라 문방사우(文房四友)는커녕 밥상 겸 책상마저 변변히 없어 마음 놓고 공부할 여건은 아니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불철주야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에서 그의 밝은 앞날을 엿볼 수 있었다. 당차게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자태나 멀리 청나라를 향해 방랑의 길을 떠나면서도 동행한 김형진의 면면을 알아보는 눈썰미는 남달랐다. 나중에 그를 긴히 쓰려는 안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사람을 대함에 있어 한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일제 군사 밀정의 만행을 보다못해 왜놈을 과감히 처단한 일이며, 이로 인한 옥살이 중에도 자신을 끊임없이 가꾸고 단련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직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아 민족을 살리는 데 이바지할 자기의 몫을 찾는 일에 일로매진하였다. 그 가운데 단연 으뜸은 독서삼매경에 빠져 사는 모습이었다. 다독과 다상량(多商量)이야말로 좋은 글쓰기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그러니 사형집행을 앞두고도 그처럼 태연자약할 수 있었던 것이요, 고종임금으로부터 극적으로 은전을 입고 탈옥한 뒤에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제 갈 길을 걸어갈 수 있었으리라.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경술국치를 당한 그날, 선생은 왜놈의 제나라 위하는 모양을 보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가진다. 어쩔 수 없는 중과부적으로 국토는 빼앗겼으나 우리 겨레붙이만은 아직 건재하다는 피맺힌 역설이었다. 이 부분이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말았다. 제아무리 되뇌어본들 이만한 순수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나라의 운명을 비장한 틈바구니에 묶어놓고 최후의 순간까지, “비록 너희가 나의 목숨은 빼앗을지언정 결코 나의 정신만은 빼앗지 못하리라.”라는 외침을 들었던 참이다. 무릇 감동이란 변함없는 본질에서 오는 법이다. 화려한 현상이 아닌 주위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올곧은 요소라야 사람을 일어서도록 힘을 북돋우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그도 인간인지라 너무나도 고통스런 옥고를 이기지 못한 채, 차라리 ‘젊은 아내가 몸이라도 팔아 내 옥바라지를 해주었으면!’하고 바랐다는 대목에 가서는 솔직히 나 또한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과연 그러할까?” 나는 이 독백을 그의 전연 때 묻지 않은 속내를 훔쳐본 것에 족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튼 그에게는 결코 순탄한 시절은 없었으나 그것이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는 없었다.
▲ 고덕신도시로 진입하는 길목
백범이 품었던 생각처럼 “일본은 한국을 오래 제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일본의 운수는 길지 못하리라.”라는 확신이 살아있는 한, 일제 치하 35년 내내 우리는 나라 잃은 설움을 딛고 언젠가는 기필코 우리의 강토를 회복시키고야 말겠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를 담보해 준 분이 그의 어머니였다. 강인한 모성에서만 나올 수 있는 훌륭한 아들의 면모는 철저한 가정교육과 조국을 향한 헌신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에 비해 처복은 없는 편이었다. 그는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먼저 간 아내를 떠나보내며 한 여인의 남편을 뛰어넘어 온 겨레의 지도자가 되었음을 감지해야 했다. 자신의 생일을 아예 기념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거기서 나왔다. 나라를 잃고 유리걸식하며 굶주림에 허덕이는 동포가 부지기수인 마당에 생일상 차림이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인간이란 스스로 낮아질 때 남들로부터 높임을 받는 것이라는 원리가 작동하는 순간이었다.
실제 김구가 지니고 있는 덕목 중 가장 큰 항목은 겸손이었다. 이는 그가 경무국장으로 발탁될 때와 국무령으로 추대될 때 밝게 빛났다. 주어진 권위에 의지하여 남보란 듯 위세를 떨칠 수도 있었으나, 냉큼 자신의 자리를 주석(主席)이라 개정하여 합의제의 의장으로서 족하며 대화합을 시도한 터였다. 그는 곧이어 의사 이봉창을 통하여 일왕을 없애려는 계획을 실행으로 옮긴다. 그 정신력 속에 내재한 강인함이 지칠 줄 모르는 힘의 원천이 되어 광복군을 창설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을 앞두었으나 바로 그 시점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패전을 앞둔 일본군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뜻하지 않은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어엿한 독립 국가의 미천한 문지기가 될지언정 한겨레의 종이 되기에 주저치 않겠다던 의기가 한순간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아직도 요원한 조국 통일에 그분의 의분과 애국심이 자못 그리운 시점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64호)에는 ‘미완의 거인을 기리며 - 김구가 소유한 특장점’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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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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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미완의 거인을 기리며 ‘남달랐던 집안 분위기’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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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가 한창 맹위를 떨치던 어느 춘삼월 학기 초입, 제자들에게 김구가 쓴 “나의 소원”을 가르치며 남달리 느낀 바가 있었다. 그 까닭인즉 이 글이 속한 ‘짜임새 있는 말과 글’이라는 대단원을 보기 전부터 평소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감으로 백범이 적격이었다는 생각을 줄곧 가다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역사에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더라도 만약 이분이 우리나라의 초석을 다졌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적잖은 부분에서 몰라보게 달라졌으리라는 아쉬움을 뇌리에서 쉬이 지울 수 없었거니와 제대로 책 한 권 구경하기 어렵던 시절 유독 네모난 책자 만지기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책 읽기, 아니 그보다는 책으로 성을 쌓아 올리는 놀이를 무척 즐기곤 했을뿐더러 그걸 이용하여 나름 경계선을 긋고 견고한 성곽을 세우며 맘에 드는 아이들과 소꿉놀이를 하는 것이 그토록 재미질 수 없어서였다. 돌이켜보면 그때마다 두툼한 책이야말로 책상이나 의자로 전용하는 데 늘 편리한 도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소소한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른들로부터 책이란 게 읽으라고 있는 게지 그렇게 못살게 굴라고 주어진 물건이 아니라는 핀잔을 연신 들어야 했고, 서당 훈장이신 할아버지 댁으로 가서 지냈던 한 해 동안은 누런 서책 끈이 떨어지고 닥나무 종이가 부스러진다는 꾸지람을 푸지게 기억 속에 저장해야 했다. 불철주야 생업에 바쁜 부모님께도 잔소리를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 아무튼 나는 비록 많은 숫자는 아닐지언정 일상처럼 크고 작은 책들을 곁에 끼고 놀았던 셈이다. 놀랍게도 그 몇 권 안 되는 책자 가운데 바로 『백범일지』가 있었다. 회상컨대 아마도 조그마한 문고본이었는데 이리 굴리고 저리 돌아다닌 끝에 사라져버린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조부께서는 김구 선생님을 깊이 흠모하고 계셨던 것 같다. 비록 그 소책자는 아니로되 손자인 내가 다시금 읽고 있으니 그야말로 대를 물려가며 그분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는 터다.
▲ 고덕신도시로 진입하는 길목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작정하고 자서전을 손에 잡았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독립군 야전사령관의 글월이 눈동자에 빨려 들어왔다. 그 유려(流麗)하고 섬세한 필치가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누구인들 생사가 경각에 달린 전쟁터에서 이만한 역사적 장면들을 일목요연하게 엮어낼 수 있을까? 아무리 떠올려봐도 『난중일기』를 빼고는 이만치 자신의 고뇌와 신념을 정리해 후세에 고스란히 담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구라는 인간 됨됨이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쉽사리 분별하면서도 적잖이 놀라울 뿐이었다. 나의 알량한 인격으로서는 언감생심 따라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白凡逸志』를 산책하며 감상문이란 형태로 나의 생각을 가다듬을 수만 있어도 마냥 흐뭇하기만 하다. 이제 주어진 과제는 이분의 진면목을 제대로 표현하는 일이다. 그간 나름대로는 어디 가서 글줄깨나 쓴다고 자부했거늘 막상 묵직한 활자들을 눈앞에 두니 왠지 끼적거리는 손목이 떨리고 요량과는 달리 문맥이 흔들려 글감을 추스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백범은 모두에서 자신을 왕손이라고 밝히면서도 스스로 상민으로 낮추는 겸손을 잃지 않았다. 시종일관 그의 솔직담백한 고백은 나를 흠칫흠칫 놀라게 만들었고, 자신의 어릴 적 생각을 남김없이 서술한 용기가 초장부터 두 눈을 붙잡았다. 다른 자서전들을 보노라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미사여구로 꾸며져 태어날 때부터 보통 사람이 아님을 과시하고, 그래야만이 존경의 대상으로 남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작동하는 것과는 확연히 달라서였다. 예컨대 아버지의 심한 매질을 책망하며 항렬에 따라 회초리를 들이대는 집안 내력은 의외였다. 더구나 어린 김구가 장연 할아버지 내외에게서 느낀 감정은 내 가슴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 일로 인해 도리어 매를 맞는 아버지의 처지를 고소해하는 순진무구한 모습에서 필자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느낀 터였다. 필자의 경우 부당한 구타(?)를 당하면서도 감히 억울하다는 의사표시는커녕 최소한의 불만조차 거의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대 억압적 사회 분위기로 보아 어느 누군들 어른 앞에서 그만치 당돌한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겠으나 그분의 특이한 유년의 모습은 새삼스러웠다. 특유의 엄격성을 유지하면서도 저마다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출하는 집안 공기가 마냥 부러웠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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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63호)에는 ‘미완의 거인을 기리며 - 일제 강점기의 치욕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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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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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가볍지 않은 생각 모음 ‘영혼을 구원할 소명감’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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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모음 열셋: 목사가 어떻게 구원이 다른 종교에도 있다고 믿느냐는 물음은 기실 진부한 논제입니다. 그렇게 가장 기본적인 교리도 모른 채 소위 목사 노릇을 하고 신대원 훈장질을 해대는 꼴이 작금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일이로되 미션스쿨인 대광고와 강남대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고 일러둔 글이 있었습니다. ‘영혼을 망치려고 작정한 듯이 기독교 교육을 멋대로 재단하는 꼴을 보니 대광고 회장이란 자가 벌이는 사태는 정녕 필연이었구나’하고 느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라고 분명히 이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가짜를 판별하려고 바로 이 구절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올시다. 그런데 기독교가 아니고서도 구원이 있다니, 정말 한심하다 못해 거룩한 분노가 입니다. 당신이야말로 사이비(似而非)라는 어휘마저 아깝군요. 아니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거부한다면 이단으로 단죄해야 마땅하지요.
신학을 미끼로 밥벌이나 하려는 ㄹㅅㅌ 씨! 당신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가 교단에 버티고 서 있는 한 뭇 영혼을 좀먹는 사탄은 그 기세를 더할 참이오! 고맙게도 그나마 목사증은 반납했다니 즉시 현직에서 물러나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망가뜨렸는지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바라오. 하긴 창조와 부활은커녕 인간의 타락과 섭리조차 믿지 않은 채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자들이 세상에는 즐비하다오. 그러니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최후심판을 믿을 리 만무고 회개의 영이 임할 수는 더욱 없을 거요. 분명히 알아두시오. 어리석은 사람의 머리로는 감히 알 수 없는 계시를 성경을 통해 알려주신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한 당신은 여전히 까막눈을 뜨고 사는 영적 무지자에 불과하오. 즉 신구약 성경의 내용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당신은 사탄의 도구로 사용될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오. 결국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자들에게 돌아가는 건 주님의 무서운 진노임을 부디 잊지 마시길!
▲ 쓸쓸한 빛이 감도는 천안 광덕산
* 생각 모음 열넷: 그래서 눈에 빨려 들어온 것이 <천국으로 초대하는 글>이었습니다. 참고로 심혈을 기울여 썼으나 교목실에서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채택하지 않았음을 밝혀둡니다. “문득 시인 김현승 님의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시구가 떠오르는 계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황금 들판이 무척이나 싱그럽습니다. 만산홍엽으로 뒤덮인 산야는 더욱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누구라도 한 번쯤은 인생의 시작과 마감에 대해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있습니다. 인생의 최대 주제인 ‘사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살아가는 동안의 행복에 대한 대안이 여기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와 함께 들어 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스스로가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할 때라야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세상에 종교는 많지만 진정으로 나의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나머지 다른 종교는 섬기는 대상이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사람일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한계를 지니고 있어 자기 자신조차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 그 이상의 진리는 없습니다.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느냐, 아니면 지옥에서 영벌을 받느냐는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이 이상 절체절명의 과제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바로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복음>의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면 결코 채울 수 없는 절대 공간을 복음으로 가득 채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온 식구가 함께 오셔서 듣고 구원을 받는 특권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풍성한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영혼의 양식을 공급해 줄 것으로 확신합니다. 결국 <기-승-전-예수>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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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62호)에는 ‘미완의 거인을 기리며 - 남달랐던 집안 분위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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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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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가볍지 않은 생각 모음 ‘훈계와 훈육을 오가니’ (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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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모음 열하나: 산에 올라갈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꼴불견 등산객들에게 보내는 일갈이렷다. 제1호는 술을 마시고 산에 기어올라 정상에서 고작 담배나 피우는 흡연중독자들은 모두 각성하시라! 그것도 모자라 바람의 방향마저 외면한 채 남들에게 탁하고 역한 연기를 들이마시게 하는 파렴치한들을 보면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기껏 백해무익한 담배나 피우자고 어렵게 산에 기어올랐는지 끽연족들에게 캐묻지 않을 수 없다. 제2호는 싸구려 화장품 냄새를 짙게 풍기며 수다를 떠는 아줌마부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명심하고 기억해두시라. 그러시다가 어리석게도 말벌에 쏘이거나 사나운 들짐승을 불러오는 바보들이 있다는 사실을! 제3호는 비좁은 길을 오가는 터에 마치 거들먹거리듯 좀체 비켜서려 들지 않는 무례한 자들을 보면 짜증이 난다. 앞으로는 제발 몸을 살짝 비틀어 지나가시면 좋으련만. 제4호는 큰 개를 이끌고 오르며 목줄도 없이 남에게 공포심을 안기는 이기주의자들이렷다. 어린 시절 개에게 물린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을 왜들 모르시는지 야속할 때가 있다. 제5호는 목청을 높여 휴대폰을 받거나 라디오를 크게 틀어 고요한 산속에 소음을 퍼뜨리는 무뢰한들은 썩 물러갈지어다. 필자 또한 그것이 작은 풀벌레들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짓임을 불과 얼마 전에야 알아차렸다.
어디 그뿐이랴. 제6호는 크고 작은 봉우리에 기어올라 큰소리로 “야호”를 목청껏 외침으로써 새소리, 물소리를 못 듣게 하는 짓인 바, 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싶다. 당신은 생태계를 교란하는 환경 파괴자라고! 제7호는 드물긴 하지만 아예 안면을 몰수하고 소변, 심지어는 대변을, 그것도 사람이 다니는 길목에다 보는 철면피들이다. 어찌나 민망했던지 아이들과 함께 얼른 도망치듯 피해주느라 걸음을 재촉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제8호는 아무 곳에나 휴지를 마구 버리거나 과일 껍질 등 음식물을 먹고 난 뒤처리가 지저분한 얌체족들이다. 정 그렇게 하고 싶거들랑 나뭇잎에 묻어주는 센스 정도는 갖추라고 귀띔해주련다. 제9호는 산중에 핀 꽃들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며 무자비하게 꺾어가는 야만인들이다. 이거 명백한 도둑질인 줄 알고 있기를 바라마지않는다. 제10호는 시도 때도 없이 가래침을 뱉어 타인의 기분을 언짢게 만드는 족속들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소리를 죽여 후미진 곳에다 살짝 뱉는 예의는 지켜주는 게 최소한의 상식이 아닐까 싶다. 아, 이런 후진적인 의식구조와 행동거지가 언제쯤 바뀌어 선진시민이 될까나!
▲ 쓸쓸한 빛이 감도는 천안 광덕산
◇ 생각 모음 열둘: 무진장 쑥스럽긴 하지만 지상에 소개하고픈 이메일 서신을 간직해오고 있었습니다. 제게는 그만치 소중한 추억이자 진심 어린 마음이기에 그렇습니다. “안녕하세요~선생님! 저는 유종현 학생 고모예요~ 찾아 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지면으로 인사드립니다. 조카가 복이 많네요!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담임선생님을 잘 만나서~ 특히나 교육이념과 목표가 뚜렷한 교육관, 축복된 신앙생활과 따듯한 배려까지~ 감사하고 축복된 신앙생활!!! 감사~감사합니다. 일일이 학생들 이름으로 아이 성격과 목표에 맞게 3행시도 지어주시고~ 일이 많으셔도 일일이 배려해주시는 모습이!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시간 내서 한번 꼭 찾아 뵐게요*^.^*~ 상황이 안 좋은데도 밝게 생활을 하는 조카 모습이 대견하고 기특하네요. 고모로서 자기의 실력과 꿈을 위해 더욱더 발전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도편달 바랍니다~ 지금도 후원과 격려 많이 해주시지만!! 가정에 축복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라면서~ 고모 유명희 올림”
나는 이제껏 받은 서신 가운데 이처럼 진정성 있는 내용을 접한 적이 없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정성껏 엄마의 역할을 감당하시는 모습만으로도 감동을 받고 위로가 되는 편지였습니다.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시는 아버지 홀로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는 가운데 제자를 올곧게 지도하려 애쓴 것밖에는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불민한 저의 불찰은 왜 내가 먼저 이분들을 개인적으로 초청해서 정중히 대접해 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안타깝게도 종현이가 졸업을 하고 나서야 겨우 그 생각을 하다니, 그러고 보면 나란 사람도 아둔하여 결정적으로 섬세하지 못한 구석이 있답니다. 정년퇴임을 하고 그간의 글들을 모아 문집을 내려다 발견한 절절한 마음이 오늘따라 내 심장을 짓누릅니다. 아, 나는 언제쯤이나 철이 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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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661호)에는 ‘가볍지 않은 생각 모음 - 영혼을 구원할 소명감’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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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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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가볍지 않은 생각 모음 ‘천거의 안목을 높여서’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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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모음 아홉: 나란 사람은 유독 의례적 공치사나 비록 선의의 거짓말일지라도 예외 없이 사실이 아닌 말글을 대충 적선하듯 건네기조차 무척 싫어하기에 다음과 같은 추천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잘 눈에 띄지 않는 한 제자에게 영혼을 담아 선물한 거의 유일한 추천사가 있어 슬며시 알리는 말씀입니다. “저는 ㅎㄴㅇ 학생에게 국어와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수업시간이면 언제나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교사를 응시하며 설명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기실 ㄴㅇ이가 귀교에 들어가서 학문을 감당하기에는 여러모로 턱없이 모자라는 성적인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신학생으로 받아달라고 여러 교수님께 추천하는 까닭은 이렇습니다. 누구보다 영혼이 맑은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을 그대로 믿는 신앙을 갖고 있을뿐더러 부활하신 예수님의 성육신과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까지 오롯이 체감하면서 살아가는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백지에 가까운 마음에 계시를 그대로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처럼 가치관이 흔들리는 시대에 ㄴㅇ이와 같은 학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실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입시지도에 매진한 교사로서 학업성적의 현실을 무작정 무시할 수 없는 학생들의 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알량한 지식으로 포장한 영적 불신이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에게 자리하고 있다면 아무리 세상의 평가가 우위에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저 역시 뒤늦게 공부에 눈을 떠 글을 쓰게 되었고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면서 하나님을 깊이 알고 싶은 마음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이 세계가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인정하는 창조신앙이 없이는 훌륭한 사역자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나아가 그동안 살펴본 결과 영혼이 깨끗하지 않고서는 썩어가는 세대에 쉽게 동화할 수밖에는 없다고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인 ㅎㄴㅇ 학생을 귀교를 빛낼 재목이라고 확신하오니 부디 미래의 자원으로 받아주십시오. ㄴㅇ이는 반드시 그 배려에 제대로 보답하는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추천사를 쓰게 되어 감사합니다. -주후 2008년 10월 11일”
▲ 쓸쓸한 빛이 감도는 천안 광덕산
◇ 생각 모음 열: 뜻밖에도 본교 출신 장군의 출판기념회에 부친 글월이 눈에 띄었습니다. 교직원들과 함께 공관에서 개최한 가든파티에 참여해 보았는데 색다른 세계를 경험한 호기(好機)였습니다. 다만 이분이 나중에 큼지막한 선거에 나갔는데 현장의 속성을 몰라 유리한 국면을 스스로 망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지금 떠올려도 뒷맛이 씁쓸한 기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리자에게 베푼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축하의 말씀을 올립니다. 막바지 꽃샘추위로 인하여 다들 몸과 마음이 움츠려들 즈음, 이렇게 훈훈한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더욱이 귀하신 분들을 대표하여 몇 마디 축하의 말씀까지 전하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잘들 아시겠지만 존경하는 장군께서는 이미 학술서적과 번역서까지 내신 관록 있는 저술가이십니다. 그토록 바쁘신 가운데서도 촌음을 아껴 이번에 또 한 권의 주옥같은 저서를 내신다니 그저 부럽고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와 같은 번듯한 옥동자를 순산하게 된 경사에 새삼 머리를 숙여 크게 경하해 마지않습니다.
이번에 간행한 <부모가 해야 할일 19가지>에는 갈수록 가정이 무너지고 어버이의 역할이 빛을 잃어 가는 마당에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꼭 해야 할 일들을 열아홉 가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인도하는 등불이요, 선견지명의 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틈틈이 심혈을 기울여 쓰신 내용인즉슨 저자 자신의 체험과 삶의 역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생생한 기록이므로 일일이 세세하게 언급하지는 않더라도 잘들 아실 것입니다. 반드시 일독하시라고 재삼 권면하고 싶습니다. 솔선수범하는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에 관한 유용한 정보들이 그야말로 차고 넘칩니다. 저마다 가정교육에 훌륭한 지침이 될 것입니다. 아무튼 자랑스러운 우리 ㅎㄱ고등학교 동문이라는 인연으로 아름다운 교제의 맥을 이어 이처럼 뜻깊은 처소에 불러주신 데 대해 다시 한번 뜨겁게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펼쳐 나가시는 장군의 사역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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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60호)에는 ‘가볍지 않은 생각 모음 - 훈계와 훈육을 오가니’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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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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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가볍지 않은 생각 모음 ‘축적한 사념의 조각들’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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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모음 일곱: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설명회를 도운 일이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급격한 출산율 저하로 인해 각급 학교들이 속속 문을 닫아야 할 딱한 형편에서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공들여 다듬은 글입니다. “여러 가지 일로 바쁘심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시간을 내어 본교 입시설명회에 참석해주신 학생 여러분과 학부모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잘 아시다시피 본교는 기독교 재단에서 세운 학교입니다.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진보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자는 기독교 정신으로 반세기의 전통을 이어온 사립 고등학교입니다. 그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모든 교직원이 하나가 되어 배전의 노력으로 교수학습 방법을 체계화하여 학력 향상에 매진한 결과 많은 재학생들에게 희망을 주게 되었고, 지난해에 이어 금년도 대학입시에서도 매우 우수한 실적이 속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대 2명, 포항공대 1명, 서울교대 1명 등 수시 1, 2차에서 괄목할 만한 결실을 맺어가는 중입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단순히 교직원들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학생들의 노력과 부모님의 지대한 관심이 커다란 역할을 감당했다고 확신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따라서 특별히 오늘 참석해 주신 학부모님께서는 우리 아이가 앞으로 어느 고교에서 공부하여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지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충분히 파악해 가시기 바랍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 학교는 진학 지도에 대한 확실한 맞춤형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립학교이기에 10년 이상 진학 지도에만 전념하는 담임교사들이 여럿 있을 뿐만 아니라 전문가 선생님들이 연구 개발한 맞춤형 프로그램으로 지도한 결과가 대학입시에 좋은 실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곧 다년간 입시지도에 노하우가 있는 선생님께서 본교에서 시행하는 맞춤형 학습 효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학교에 대한 여러 가지 말씀을 해드릴 것입니다. 잘 들어주시고 현명한 판단으로 본교를 선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결코 후회하시지 않도록 저희 교직원들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자주 찾아주시고 오가는 길에 틈나는 대로 들러주셔서 궁금한 사항에 대해 문의해 주십시오. 부디 대학 진학과 관련된 유익한 정보와 자료를 듬뿍 안고 가실 수 있었으면 합니다. 모쪼록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학부모님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쓸쓸한 빛이 감도는 천안 광덕산
◇ 생각 모음 여덟: 자료의 창고를 뒤적이다 보니 학기 중 학년에서 학부모님께 드리는 글이 보였습니다. 지난 일이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만난 내용을 읽어 보니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왔습니다. 당시 언어관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불철주야 사랑하는 자녀들을 양육하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저만치 물러가고 이제는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수확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 불어닥친 경제 한파로 인해 온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럴수록 본교에서는 나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이야말로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소중한 일이라 생각하여 매년 사랑의 쌀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동안 잊지 않으시고 매번 용기를 주시고 따뜻이 격려해 주신 마음을 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소외된 이웃들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십시일반 헌미를 모으고 섬기는 일에 정성껏 협조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광학교는 기독교교육을 목적으로 세운 배움터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큰 뜻을 품고 작은 일에 충성하라는 교훈 아래 나름대로 정진한다고 노력했지만 연약한 사람들이 계획하고 시행하는 일인지라 때로는 실수하고 부족한 부분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선한 일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해 주신 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며, 저희 기독교사들은 더욱 복음 안에서 혼연일체가 되어 생명을 살리는 복음교육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혹시 잘못되어가는 일이 보이거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시정할 사항이 있으시거든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고칠 부분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시행할 것입니다. 부디 가족 모두 영육 간에 강건하시고 저무는 한 해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앞으로도 변함없는 애정과 충고를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 예수님의 은혜가 학부모님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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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659호)에는 ‘가볍지 않은 생각 모음 - 천거의 안목을 높여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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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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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가볍지 않은 생각 모음 ‘소외된 지점을 엿보니’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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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모음 다섯: 오래전 ‘포스코 신문’에 실린 “이런 생각 저런 의견” 중 하나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지나치다. 이제는 확 달라져야 한다. 지난 호 ‘목요 데이트 칼럼’의 함인희 교수 글을 읽으면서 장애인 가족으로서 겪었던 필자의 아픈 경험에 대해 참으로 안타까웠다. 교통사고율을 비롯한 여타 부분에서도 부끄러운 세계 상위권이 많지만 특히 장애인 복지 측면은 우리 사회의 후진적 인식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심각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장애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예비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세상에 사는 현실에서 누구라도 그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실제로 선천적인 장애인보다는 후천적으로 장애를 입은 이들이 훨씬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상대의 여건을 고려하되 단지 배려하는 차원에서 느긋이 기다려주는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다.
장애인은 우리 비장애인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불편한 장애를 지녔기에 사회로부터 더 많은 편의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들을 우선하여 배려해야 할 까닭은 자명하다. 비장애인들은 오래전부터 그들을 위주로 편리하게 이뤄진 각종 시설과 수많은 제도 속에서 상대적으로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함 교수의 글은 그간의 고정관념과 편견의 현주소를 다시금 되짚어 보게 한 글이었다. 기실 필자 역시 그간 무심코 지나쳤던 사각지대에 대해 깨우친 바가 컸다. 더불어 “어느 비장애인의 멋쩍은 일고(一顧)”라는 중수필을 탈고한 일은 담장이 아닌 담벼락을 뛰어넘은 큰 결실이었다. 더욱 내용을 보완하고 정성껏 다듬어 지역신문에 기고함으로써 다들 생각할 계기를 마련했을뿐더러 출간한 책자의 한 단원으로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 쓸쓸한 빛이 감도는 천안 광덕산
◇ 생각 모음 여섯: 위 얘기와는 좀 다르기는 하지만 불황의 고리에 대한 의견이나 분석이 분분하다. 매년 즐거운 명절을 맞이하건만 저마다 못 살겠다고들 아우성이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지방의 한 재래시장에서는 평소보다 되레 손님이 줄어들었다고들 울상이다. 기업은 기업대로, 가계는 가계대로 온통 어려운 처지를 호소하는 소리뿐이다. 일견 호들갑에 가까운 걸 감안하더라도 불황의 끝이 어디인지 도통 모를 만큼 혹독한 시련의 연속극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그 실태를 들여다보면 이런저런 문제의 핵심을 짚어낼 수밖에 없다. 먼저 오늘날은 세시풍속에 따른 명절이라고 해서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거나 따로 의복을 마련할 까닭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실제 설빔이란 낱말을 들어본 때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호의호식은 화두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분수를 모르고 치장하는 데 눈살을 찌푸리고 너무들 먹어 탈이 나는 세상이다. 여기저기 앞다퉈 살 빼기에 안간힘을 쓰니 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온 나라가 과소비에 몸살을 앓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시각을 바꿔 우리 사회가 점차 근검절약하는 미풍양속으로 정착해 간다고 볼 수는 없을까? 아직 곳곳에 장날이 서기는 해도 상설시장이 대세인 데다 인터넷 구매가 생활화에 접어든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거리를 걷다 보면 가게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2018년 OECD에서 발표한 취업자 중 자영업자의 비중은 21%에 달한다. 이는 2004년 말 기준 33.6%보다는 2/3로 줄어들었지만 10% 내외인 선진국에 비하면 그 심각성이 두드러진다. 놀랍게도 세 끼 식사를 밖에서 해결하는 나라들을 빼놓고는 미국과 멕시코 다음으로 세 번째에 해당한다. 유럽의 소국인 룩셈부르크와 아이슬란드는 최하위권이다. 크고 작은 길가 어디를 걸어도 이처럼 동종업계의 점포들이 앞다퉈 경쟁하듯 들어서는 곳이 한국 말고 또 있을까? 참고로 1989년에는 무려 40.8%에 달했다가 2018년에는 25.1%까지 떨어져 OECD 7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매스컴의 시각에 일대 변화가 있어야 한다. 가령 소외된 이웃 돌보기, 의례적이 아닌 진정한 효도의 길, 해마다 두 차례씩 빚어지는 교통체증의 비효율성, 매장문화로 인한 산지의 황폐화, 고학력 젊은이의 귀농 대책, 실직자의 재교육 및 지원방안, 지구촌의 바람직한 명절 문화 중 특정 종교의 관점을 벗어나 관혼상제 문화에 허례허식의 요소는 없는지 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모름지기 언론의 책무는 국민의 눈높이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파헤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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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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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가볍지 않은 생각 모음 ‘도처에 불거진 문제점’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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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모음 셋: 요즘 부쩍 굴지의 신문에서는 내세운 제목처럼 ‘횡설수설’을 자초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태어날 때 부여받은 성(性)이란 천부적인 것으로 절대 자력으로 바꾸거나 타의에 의해 바뀔 수 없다. 세간에 언뜻 여자처럼 생긴 한 남자를 두고 신기해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나 사람이면 누구나 여러 원형들 가운데 남성 속의 여성성(anima)과 여성 속의 남성성(animus)을 갖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쪽 요소가 얼마든지 증가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그런 성향을 보고 너도나도 성을 전환하겠다고 나선다면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힘들게 의사가 된 마당에 의술을 함부로 사용해 자궁도 없는 여성 모형을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진짜 여자로 인정할 수도 없을뿐더러 각종 성형수술을 통하거나 간헐적으로 에스트로겐(여성 호르몬)을 주입함으로써 유지되는 여성적인 현상을 도대체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가? 단언컨대 동성애는 음란한 성애(聖愛)의 배설에 불과하다. 앞장서서 찬성의 기치를 높이 쳐든 분들에게 캐묻노니 당신의 며느리가 남성이고, 당신의 사위가 여성이라고 해도 그 기막힌 현실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응답하기 원하노라. 해괴한 위선자의 실상이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참이다.
따라서 이런 성전환자들에게 일부 판사가 성을 바꿔주는 일은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성적 경계를 무너뜨리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앞으로 주민등록번호만 보고 속아서 파혼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정상적인 부부관계조차 위험에 빠뜨릴 개연성이 크다. 얼마 전 대한변협과 의사협회에서도 이에 대해 허용해서는 안 될 사안이라며 성명까지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여타 성적 소수자를 인격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데는 필자 역시 동의하지만, 세상에는 해서 될 일이 있고 시도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바로 사람의 성을 인위적으로 전환하는 수술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가운데 으뜸이다. 그러한 시각에서 한동대와 한기총에서 발표한 동성애에 관한 성명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스스로 기독교의 범주에 들어있다고 주장하거나 착각하는 측의 의견에는 찬동할 수 없다. 참고로 필자는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참고할 만한 책자나 자료가 태부족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를 논제로 과제를 수행한 바 있다. 비록 20년 전이어서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 각주로 단 경우가 많았으나 당시 그 분야의 연구에 시동을 걸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 쓸쓸한 빛이 감도는 천안 광덕산
◇ 생각 모음 넷: 2004.10월호 <인권>의 독자로서 투고한 내용이다. ‘국가보안법’이란 족쇄는 언제쯤 풀릴 수 있을까? 물론 북한의 ‘인민보안단속법’에 대응하는 조치와 병행해야 한다는 반론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보안법, 50년이면 충분하다”라는 논리는 매우 타당하고 명쾌하다. 국가보안법의 역기능이야말로 반세기를 옥죈 쇠사슬임이 분명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민주 인사들을 탄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를 서슴지 않았는지 캐묻고 싶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더는 전쟁을 방불한 비상시기가 아니다. 남북이 대화로 매듭을 풀어 통일을 이루자는 마당에 서로를 적대시하는 처사는 옳지 않다. 남북 기본합의서를 기반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의 초석을 놓았기에 6·15 남북 공동선언과 10·4 남북 공동선언으로 이어졌으며, 불과 얼마 전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과 평양을 오가며 동족의 우의를 다지고 함께 미래를 설계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현재의 교착 상태가 안타깝기는 하지만 조만간 풀리리라고 기대한다.
국가를 지키는 가장 큰 힘은 자발적 애국심이다. 타율적으로 강요된 일사불란은 사상누각일 가능성이 높다.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우러난 협력과 민의가 나라를 사수하는 원동력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재와 대법원에 이어 법무부까지 국보법 사수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하니 실로 착잡하다. 우리 사회가 과거의 냉전체제로 회귀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내기 어려워서다.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지적처럼 이제는 국보법을 박제로 만들어 박물관에 전시할 때가 되었다. 만의 하나 안보 전선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형법’을 보완하면 될 일이다. 게다가 사안별 적용이 기능한 ‘사회안전법’까지 두고 있지 않은가? 후자로 통합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본다. 뿌리 깊은 의식구조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만큼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구시대의 낡은 법복을 과감히 벗어버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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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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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가볍지 않은 생각 모음 ‘교과서 너머를 살피니’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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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모음 하나: 평소 학교도서관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중앙 일간지에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학교의 얼굴이라는 도서관이 너무 낙후되어 하루 너덧 시간씩 수업하랴 틈틈이 잔무 처리하랴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던 때가 있었다. 기본적인 대출과 반납 시스템은 물론 불편한 동선으로 인한 민원이 한둘이 아니다. 시설 전반이 한마디로 열악하기 짝이 없어 지식의 보고(寶庫)를 관리하는 자리에서 생각하는 것들이 적잖았다. 요로(要路)를 통해 건의도 해봤으나 대개는 가볍게들 취급하는 바람에 도서관인으로서 아쉬움이 컸었다. 그러한 가운데 주말마다 부쳐오는 ‘책의 향기’라는 별지의 효용이 업무에 뜻하지 않게 기여하는 바가 있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으니 호소하는 심정으로 거드는 말을 써서 부친 적도 있다. ‘이 주일의 베스트셀러’는 물론 ‘저자는 말한다’에서도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 이것저것 신간을 심층적으로 소개하는 기사들이 소장할 장서를 선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 가지 ‘내가 요즘 읽는 책’에서는 서명 외에 좀 더 상세한 출판사항을 넣으면 호평을 받을 것이다. 쉽고도 재미있는 서평의 기능을 충실히 갖춰 달라는 요청이다.
사실 공교육을 살리는 지름길은 도서관을 활성화하는 데 있다. 학생들이 도서관을 놀이터 삼아 자투리 시간마다 모여드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도서관이 방과 후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장소로 기능할 때라야 학교는 학교답게 살아날 수 있다. 경향각지(京鄕各地) 각 신문이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차제에 <전국 학교도서관 순례> 난을 신설해 달라고 요구한다. 초중고로 나눠 매주 번갈아 가며 학교도서관의 현주소를 파악해 심각한 실태를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 그걸 도서관 후진국의 불명예를 씻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선진국에 비해 아직 뒤떨어져 있는 공공도서관도 마찬가지다. 지역사회 도서관의 면면이 곧 그 나라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꾸밈없는 얼굴이 아름다울 때 고개를 끄덕이는 법이다. 고을마다 동네마다 발걸음 닿는 곳이면 크고 작은 도서관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 열악하기 그지없는 학교도서관 시설 개선을 위해 언론기관이 나서주면 국민교육의 현장도 눈에 띄게 달라질 것이다.
▲ 100대 명산 중 하나인 광덕산 입구
◇ 생각 모음 둘: 지상(紙上)에 연일 점입가경의 민낯이 보여 항변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발표한 촌지 근절방안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이를테면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을 주고받을 때 교사뿐만 아니라 학생에게도 불이익을 준다는 발상인데 전적으로 옳지 않다. 일면 형평성과 타당성이 있어 뵈지만 이는 매우 비교육적인 처사로 다음과 같은 오류를 야기할 확률이 높다. 우선 시상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당사자가 받을 만할 때 주는 것인데 부모의 잘못으로 인해 자식의 수상 자체가 원천봉쇄된다면 일종의 연좌제에 불과하다. 어느 학생이건 가능성이 있는 분야에 칭찬과 용기를 북돋우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교육 본연의 목적은 어찌할 셈인가? 또한 촌지를 받는 일부분의 교사를 언제까지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교사와 동일시할 참인가? 고작 10여만 원 정도의 푼돈에 양심을 파는 일탈은 적어도 필자가 근무하는 지역에서는 거의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실제 촌지로 인해 물의를 일으킨 예조차 거의 없다. 이거야말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차제에 몇몇 공영방송의 보도 태도에도 고칠 부분이 있다. “학부모의 촌지를 주는 행위가 아이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식으로 전달해서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아이들은 죄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말일 텐데, 자칫 대다수 교사들이 불의한 금품이나 바라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다. 모든 교육과정은 교사의 교육적 권위를 당당히 세워줄 때 올바로 설 수 있다. 주어진 권한 행사에 잘못이 있다면 일벌백계의 처벌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데는 흔쾌히 동의하지만, 극히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싸잡아 폄훼하는 행정편의주의적 조치는 제발 그만두기를 촉구한다. 교육일선에서 뼈가 굵은 교사로서 그간의 경험칙을 덧붙이자면 가정에서부터 근본이 비뚤어진 아이를 학교 현장의 교육적 수단으로 교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적어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맞아들어간다. 부디 부모, 교사, 당국이 힘을 모아 미래세대교육을 함께 이끌어 가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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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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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주왕산 바윗돌 ‘길 가다 만난 기암괴석’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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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시공을 찾아 가족여행을 하던 중 느닷없이 들른 곳이 있었다. 동쪽 바닷가 영덕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이정표를 보니 ‘주왕산 국립공원’, 여기가 바로 그 주왕의 전설이 알알이 박혀있다는 거기로구나! 언뜻 듣기로도 선경에 비견할 만한 비경을 뽐낸다더니 먼발치에서 바라봐도 전혀 낭설은 아니었다. 놀라움 반 반가움 반으로 예정에도 없이 그쪽 입구를 향해 냅다 차를 몰았다. 매표소에 도착해 사방을 휘 둘러보니 첫눈에 들어온 것은 뫼의 반 이상을 뒤덮고 있는 장엄한 바윗돌. 마치 정성껏 분재해놓은 듯 싱싱한 소나무들이 제각각 균형을 잡고 암석 틈바구니마다 알알이 박혀있었다. 이토록 장관이니 ‘석병산(石屛山)’으로 칭할 수밖에. 마치 바위로 병풍을 두른 거 같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는데 잠시 간판에 적힌 깨알 같은 글씨를 읽어보니 그 옛날 중국 은나라 마지막 왕의 사연이 골짜기에 굽이굽이 서려 있다는 설명이었다.
주왕산은 그 이름의 유래부터 전설에 기인했다. 주왕의 본명은 원래 ‘주도’였단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범상치 않았을뿐더러 5세 때 글을 깨쳐 11세에 이미 병법서인 육도삼략(六韜三略)과 천문지리에 능통했으며, 그때부터 “황하의 물을 들이키고 태산을 갈아 없애버리겠다”라고 호언장담하며 군사를 끌어모아 후일을 도모하지만, 그가 꿈꾼 새로운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중과부적을 느낀 나머지 신라까지 쫓겨가 몸을 피한 곳이 바로 여기였고, 온갖 위장술을 동원하여 끈질기게 버티다가 그만 한중 양국의 양동작전에 걸려들어 끝내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패각하던 중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낭떠러지 중간에 요새처럼 뚫린 굴속으로 숨어들었단다. 하지만 도피의 세월도 잠깐, 마침내 주왕은 천명을 다한 듯 귀신도 모를 것 같던 천혜의 은신처에서 뒤쫓던 마장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최후를 맞으며 한 많은 생을 마쳐야 했다. 바로 그 주왕을 본떠 붙여진 이름이 주왕산이고 주왕굴이란다.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줄곧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었다는데 대전사(大典寺)와 백련사(百蓮寺) 또한 그가 남긴 남매의 이름을 딴 절이라며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 경상북도 청송군에 소재한 주왕산 <제공 = 주왕산 국립공원>
경상북도 청송과 영덕 일대를 두르고 자리한 주왕산. 보자마자 한눈에 빨려 들어온 산자락이요, 그 생김새 또한 수려하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해발 722m 높이의 뫼를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 오르기로 했다. 온갖 기암괴석들이 울창한 수풀과 어우러져 신묘막측한 풍광을 연출하는 산속으로 기꺼이 들어가 보리라 당차게 마음먹은 터. 행장을 보니 산행을 하기에는 적잖이 어설프다. 등산화는커녕 간편한 바지마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였다. 게다가 해가 이미 중천에 떴으니 잰걸음이어야 하리라. 하지만 우리네 산행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 해낼 수 있다는 격려를 아이들에게 곁들이며 바위가 돌계단을 이루고 있는 호젓한 등산로를 따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산세가 웅장하고 골짜기가 깊어 발길 닿는 데마다 명경지수(明鏡止水). 걸음을 서두른 탓인지 우리는 금세 콸콸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니 더욱 밋밋하게 오르다 말 수는 없는 노릇. 큰 뫼를 딛고 눈을 들어 위를 바라다보니 푸르른 수림이 잔뜩 우거진 틈새로 높푸른 하늘이 활짝 웃으며 화답한 데 이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새털구름이 화들짝 놀란 듯 엄청난 크기의 돌덩이를 주의하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읽었던 글줄이 떠올랐다. 명품을 그린 병풍이로되 잔솔가지가 너무 늘어져 한쪽으로 치우친 품이 흠이라는 촌평. 그걸 좀 빌리면, 하늘로 솟아난 듯한 정자에 날아오르는 백학 한 쌍이 빠져버려 가벼워진 기품이 자못 아쉽다는 푸념에 묵직한 동양화의 진경산수화 한 폭이라기에는 적이 모자라서 못내 애를 태우다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른 곳이 여기였다는 구절이었다. 막상 그곳에 깊숙이 들어오니 연달아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한반도의 등뼈로 구실을 하는 태백산맥의 남쪽 끝자락에 스리슬쩍 우뚝 솟은 명산으로써 웅대한 바위산의 위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절경이라 하여 하등 나무랄 데가 없으렷다. 이제부터는 바위벽과 암벽 사이를 타고 올라야 한다. 난감한 건 밑바닥에 때 이른 낙엽과 푸석푸석한 돌가루가 수북이 쌓였다는 점. 위쪽으로 발길을 내딛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신발이 불편하여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자꾸만 미끄러지기 일쑤. 고맙게도 아이들이 오히려 성큼성큼 순발력 있게 잘 따라붙어 주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54호)에는 ‘주왕산 바윗돌 - 고초를 겪고 오른 지점’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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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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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주왕산 바윗돌 ‘고초를 겪고 오른 지점’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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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 모자 아래 두른 손수건이 금세 짠물로 흥건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랜 가뭄으로 인해 흙먼지마저 풀풀 날린다. 가쁜 숨은 턱밑까지 차올라 몇 마디 건네는 입말조차 애를 먹을 정도. 솔직히 이쯤 해서 그만 내려가 버릴까 망설여도 보았다. 그러나 이 난국을 참고 묵묵히 오르는 두 아이를 보는 순간 게으른 잡념이 이내 사라졌다. 위를 쳐다보니 반갑게도 중턱이로되 산꼭대기가 코앞이었다. 비록 정상은 아닐지언정 봉우리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라도 정복하려던 참이었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딸아이를 데리고 뒤따라오던 아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빨리 비켜, 은빛 빨리!” 바위벽 사이에서 제법 큰 암석 덩어리 한 개가 뚝 떨어져 아이 쪽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모든 사고가 그렇듯이 벌어진 일은 일순간. 눈앞이 아득하고 정신은 아찔했다. 주위에 온통 암흑이 좍 깔린 것 같았다. 다행히도 아이는 굴러오는 돌을 침착하게 피했고 별반 놀란 눈치도 아니었다. 실로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큰일을 당할 뻔한 위기였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일이 있고 난 직후 겨우 한숨 돌리나 싶을 적에 이번엔 아들녀석이 높다란 바위벽을 붙잡고 자신만만하게 기어오르다가 반길 밑으로 맥없이 떨어져 버렸다. 평소에 유독 산을 곧잘 타서 그때마다 칭찬을 푸지게 들은 아이였기에 더 놀랄 수밖에. 빼빼 마른 체구에 가벼운 몸놀림으로 딴은 제 진가를 나타내려는 소영웅심이 발동한 참에 무리하게 올라붙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버린 터였다. 다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건 당연지사. 나는 얼떨결에 일어난 아이를 엉겁결에 끌어안았다. “아빠, 저 안 아파요!” 아이가 황급히 내뱉는 첫마디였다. “정말이야? 정말 괜찮은 거야?” “네, 그렇다니까요?” 하지만 난생처음 당하는 사고에 놀란 기색이 뚜렷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가방을 메고 있었다. 엄마가 본능적으로 품에 아이를 끌어안고 다독거리며 진정시켰다. 정신을 가다듬고 온몸을 훑어보니 신기하게도 긁힌 자국 한 군데 없었다. 나는 등판이며 팔다리를 번갈아 주무르며 일어났다 앉아보라고 두어 차례 주문하면서 목을 만져보고 좌우로 움직여보라는 말에도 아이는 충실히 움직였다. 일단 별 이상은 없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 점이 도리어 불안한 지점. 혹여라도 속에서 골병이 든 건 아닐까 하는 방정맞은 의구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 주왕산의 가을 <제공 = 주왕산 국립공원>
그렇다면 불과 얼마 남지 않은 산정까지 올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부간에 얼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진퇴유곡에 아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의외라 싶게 이왕지사 끝까지 올라가자는 제안이었다. 예상치 못한 진행에 아이들도 적잖이 놀란 눈치. 나는 대뜸 대대적인 환영성명(?)을 발표했다. 그야말로 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선언이라고! 물론 나의 고마운 속내였을 뿐이다. 문제는 아이들의 심리상태.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기어코 산꼭대기에 세워야 한다는 판단은 어쩌면 어른의 옹고집일 수 있고 섣부른 독단이 될지도 모르겠기에 잠시 망설여야 했다. 아이들에게 의사를 물으니 흔쾌히 동의에 제청. 그렇게 우리 넷은 어렵사리 목표한 정상을 밟고야 말았다. 그야말로 천하를 몽땅 껴안은 기분. 저 아래 뵈는 주왕산의 바윗돌이 방금 전 그 모습 같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맘껏 칭찬해주며 “드디어 해냈다”라고 미소짓는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금도 그 대견한 장면의 사진을 꺼내 보노라면 흐뭇한 웃음과 함께 그 시공에 감돌던 비장한 기운을 새삼 소환하곤 한다.
이제 흔쾌히 내려가야 할 시점. 역시나 하산길의 복병 또한 언제 떨어져 구를지 모를 돌들이었다. 입에서는 연신 조심 또 조심을 부르댔다. 나는 극도로 긴장한 데다 산에서 나는 세미한 소리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숨을 죽였다. 모두 잘 따라준 덕분에 생각보다 훨씬 빨리 산밑에 닿을 수 있었다. 아이 둘이서 거의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내려온 성취감이 우리 식구를 한껏 고무시킨 현장. 선명한 주왕굴 표지가 눈에 띈 것은 그 뒤였다. 하지만 이미 여름 해가 서산에 걸렸을뿐더러 이만큼으로도 족하고 남을 하루가 아닌가. 역경을 딛고 올라선 아이들의 기개가 자못 자랑스러웠다. 그래 오늘 체험을 인생의 소중한 계기로 삼아 앞으로 닥쳐올 온갖 시련을 당차게 헤쳐나가렴. 끝으로 남은 행사는 시냇물에 발 씻기. 매끈한 바윗돌을 깔고 앉아 맑은 물을 한 움큼 꼭 쥐어 메마른 목청을 축였다. 아, 이 달콤한 맛이야말로 여행 중 산행의 산뜻한 뒤끝이 아니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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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55호)에는 ‘가볍지 않은 생각 모음 - 교과서 너머를 살피니’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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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