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다른 사람 속도가 아닌 내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걷고, 욕심은 버려야 하는 길”


 

증명사진.png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 과유불급(過猶不及),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


벨로라도(Belorado)를 출발해,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로 갈 때였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아서인지 목표로 했던 오르테가에 일찍 도착했다.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더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아타푸에르카(Atapuerca)까지 더 가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목표보다 더 많이 걸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힘이 났다. 그런데 웬걸? 아타푸에르카에 도착한 뒤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길을 걷다 들었던 정보로는 이곳에 2곳의 알베르게(Albergue, 숙박시설의 한 종류로, 순례자들이 이용하는 숙박업소)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한 곳은 없어졌다고 하고, 또 다른 곳은 이미 인원이 다 찬 상태였다. 힘들게 왔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남은 시간을 볼 때 앞으로 더 나갈 수 없고, 뒤로 돌아가자니 아까운 그런 딜레마, 결국 오르테가로 되돌아가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다 되돌아갔던 과유불급을 몸소 경험했던 순간이었다. 이날의 경험 때문인지 이후 길을 걸을 때는 욕심을 내지 않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가까이에 있는 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김희태 산티아고 메인.JPG

▲ 산티아고를 향해 걷는 순례자들

 

하루에 얼마쯤 걸어야 좋은지 묻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개인차에 따라 다른 부분이다. 다만 알베르게 수속과 씨에스타 시간을 고려하면 오전 중에 걷기를 마칠 것을 권장하는데, 이 경우 보통 20km 정도가 적당하다. 더 많이 가고 싶은 이들은 새벽 일찍 출발해서 시간을 조정하면 되는데, 본인의 일정과 건강, 걷는 속도 등을 고려해서 정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걷는다고 나도 그렇게 걸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천천히 가나 빠르게 가나 결국은 산티아고가 목적지인 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상인 것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김희태 산티아고2.JPG

▲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로 가는 길

 

한편, 산티아고 길을 걷다 보면 갈림길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갈림길이 주는 철학적인 주제는 꽤 생각해 볼 만하다. 마치 예전에 본 <인생극장> 속 두 갈래의 선택 가운데 주인공이 외쳤던 “그래! 선택했어” 이런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내 인생의 갈림길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하려나?’라는 질문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 밖에 길을 걷다 보면 십자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이 길을 걷는 사람들, 그리고 나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일지 길을 걷는 동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김희태 산티아고3.JPG

▲ 길 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십자가, 나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일까?

 

김희태 산티아고4.JPG

▲ 갈림길이 주는 철학적인 주제

 

■ 길을 걸을수록 가벼워지는 배낭, 비워야 쉽게 걸을 수 있다


처음 산티아고 가는 길을 준비하면서, 배낭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장기간 걷는 건 해본 적이 없기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내 필요하다 싶은 건 다 챙겼다. 여분의 속옷과 의류, 세면도구, 바람막이, 침낭, 샌들, 손전등, 의약품, 라면, 책 등을 챙기다 보니 짐을 많이 넣을 수 있는 배낭이었음에도 다 차고, 무게 역시 무거워졌다.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배낭을 메고 산티아고 길에 나섰다.

 

김희태 산티아고5.JPG

▲ 오세브리오(O Cebreiro)에서, 마을 돌아다니며 추억을 만들어간 하루

 

김희태 산티아고6.JPG

▲ 길을 걷던 중에도 틈틈이 배낭을 내려두고, 잠시 따사로운 햇살을 피하며 쉬었다.

 

하지만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는 건 쉬운 것이 아니었다. 걷다 보니 조금씩 어깨가 아팠고, 걷는 속도 역시 예상보다 늦어지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필요하지 않은 것을 추려내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는데, 무게를 차지한 책의 경우 어느 알베르게에 머물 때 두고 나왔다. 나에게는 필요가 없지만, 어쩌면 길을 걷는 누군가 그 책을 보지 않을까라는 위안을 삼았다.

 

김희태 산티아고7.JPG

▲ 페르돈 언덕에서 잠시 쉬어가며

 

첫날 피레네산맥을 넘을 때 물 때문에 워낙 고생했던 경험 때문에, 이후부터 나는 물 1리터를 배낭에 넣어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정작 이후부터는 물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였다. 또한 길을 걷던 중 등산화가 말썽이었는데,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쯤 등산화 밑창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 상태로 오래 걷기가 어렵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했다. 이 밖에 악명 높은 ‘배드버거(빈대)’에 된통 당한 뒤 침낭 역시 믿을 수가 없었다.

 

김희태 산티아고8.JPG

▲ 길었던 길의 끝에서, 긴 여정을 함께 했던 등산화

 

김희태 산티아고9.JPG

▲ 피니스테레. 0km 표석에서

 

때문에 산티아고 길의 마지막 여정인 피니스테레(Finisterre)에 도착했을 때 등산화와 침낭, 여분의 속옷과 옷가지 등도 모두 버렸다. 특히, 전통에 따라 이곳에서 소지품을 불태우고, 버렸는데, 이후 무겁던 배낭의 무게가 절반 이상으로 줄었다. 이 순간 비워야 가벼워진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필요할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왔지만, 정작 길의 끝에 도착한 뒤에야 이 사실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언제가 다시 산티아고 길을 걸어볼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비워야 쉽게 걸을 수 있다는 걸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

 

김희태 산티아고10.JPG

▲ 모든 것을 불태우고, 버렸던 시간. 버려야 채워짐을 몸으로 느꼈던 순간이다.

 

한편, 피니스테레에 도착한 뒤 종착점을 향해 걸어갔다. 0km가 적힌 표석 앞에서, 그동안 걸어왔던 산티아고 가는 길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대서양 해변에 발을 담근 채 나름의 사색을 즐겼던 시간, 길의 끝에서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비우고, 기다리고, 걸어가는 이 경험이 나의 인생에 있어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는다.


태그

전체댓글 0

  • 46606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김희태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 비워야 쉽게 걸을 수 있는 산티아고 가는 길 ④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