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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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평택성결교회 원로목사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농촌교회에서 시무할 때 목격한 일이다. 농사를 짓는 한 농부의 자녀가 발달장애아였다. 이 자녀의 엄마는 다른 자녀를 시어머니께 맡겨둔 채 인천 특수학교 근처에 세를 살면서 교육과 돌봄을 했다. 방학 때엔 시골로 돌아와 지냈다.


나는 온 가족이 겪는 고충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인천 월세 사는 집에도 가보았다. 다른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겪는 엄마의 눈물을 피부적으로 느껴보았다. 다른 손주들을 돌보는 할머니의 늘 어두운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농촌교회에서 시무할 때 보았던 일이다. 남편이 철도원으로 일하다가 일찍 순직해서 결국 네 자녀를 혼자 떠맡아 농사를 지으며 키우는 한 어머니를 보았다. 그런데 장남이 발달장애아였다. 시설로 보낼 처지가 아니라 데리고 살았다. 동네 아이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이렇게 발달장애아를 둔 부모와 가족들이 겪는 처연한 고통을 비장애인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똑같은 현실을 다시 맞이해야 하는 그들의 고통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


나의 죽마고우 중 한 친구는 첫아이가 뇌성마비를 앓았다. 이 아이로 인해 삶의 패턴이 달라졌다. 중증 이상의 증세를 가졌기에 온몸이 시도 때도 없이 비틀어져서 수시로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거나 팔을 흔들어 주어야 했다. 세끼 밥도 먹여주었다. 가족 중 누군가는 이 아이 곁을 한순간도 떠날 수 없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아이가 16세쯤 되었을 때 부모 곁을 떠나 세상을 달리했다. 그때까지 온 가족이 겪는 일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장애아 부모가 고스란히 겪어야 하는 뼈아픈 고통을.


올해 장애인의 날은 우리의 아픈 구석을 더 아프게 한다. 발달장애인 엄마 500여 명이 거리에 나와 삭발을 했다. 왜 그런 집단적인 행동을 했을까? 보통의 엄마들이 아니라 평소에도 숱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엄마들이 왜 그래야 했을까? 우리의 무덤덤했던 행동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발달장애인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말한다. “사회의 일반 같은 또래에 비하여 신체적 또는 정신적인 발달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자녀를 둔 엄마들의 집단 삭발은 이 사회를 향한 평범한 메시지가 아니라고 본다. 피눈물 어린 절규요, 모성적 본능에서 나오는 몸부림이다.


그 행동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자. 엄마들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가 떠나고 나면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요?”, “누가 이 아이들을 돌봐 줄 건가요?”, “이 아이들을 위해 제도적인 개선과 예산을 똑바로 세워주세요”


이 목소리에 담긴 뜻은 과연 무엇일까? 사회가 부모심정으로 공감해 주기를? 제도적으로 돌봄 보장과 실제로 예산을 증액하기를? 발달장애아 교육환경을 재고해 보기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인식변화가 일어나기를? 제발 그들이 세상을 공포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기를? 이런 메시지가 담긴 것이리라. 이런 희망을 말하는 게 아닌가? 이런 미래를 만들어 가자는 애원이 아닌가?


전장연(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은 장애인의 날에 서울 지하철 세 군데에서 시위를 했다. 이들의 극단적 행동에 동의하는 시민도 있고, 비난하는 시민도 있었다. 필자는 그들의 구호를 떠나 모든 장애인을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최근에 가난으로 인해 발달장애 자녀를 살해한 어머니가 법정에서 사죄의 눈물을 흘리며 애곡하는 기사를 보았다. 발달장애아를 둔 가정의 빈곤을 방치한 사회적 책임을 절감했다.


나의 장애우 절친의 어머니께서 임종 몇 해 전에 하시던 말씀을 기억한다. “너희들이 내 아들 곁에 있어서 고맙다. 아들이 장애인이고 손녀는 뇌성마비인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에게 질문했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아였던 자녀는 누구의 죄 때문인가? 부모의 죄인가, 아니면 자녀의 죄인가?” 예수는 무엇이라고 답했는가? 아마 부모도 근원적인 질문을 수도 없이 던졌을 것이다. “왜 나에게 이 아이를 맡기신 겁니까? 하나님!” 예수의 대답은 단순했다. “너를 통해 내가 할 일을 하려는 것이다.” 약자를 통한 나의 메시지가 세상에 나타나기를?


아픈 손가락에 신경이 더 쓰이듯 사랑은 약한 곳으로 흐른다. 그들이 너희 곁에 있음은 사랑을 완성하라는 것이다. 사랑으로 창조된 세상을 사랑으로 완성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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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칼럼] 엄마의 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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