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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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평택성결교회 원로목사

혼란한 한 주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강원도 산불 소식에 마음이 함께 타들어갔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전쟁 소식에 안타까움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이보다 더 속을 시끄럽게 한 것은 대선 경쟁 최후의 결전, 개표 상황을 지켜보며 밤을 꼬박 지새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평안이나 평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갈망하는 모두의 소원이지만.


포화에 지친 우크라이나 피난민들 틈에서 일어나 겨울왕국을 부르는 어린 천사소녀의 목소리는 평화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탱크에 맞서 러시아 병사에게 삿대질하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억세게 소리치는 소녀의 절규에 평화에의 갈망이 배어 있었다. 평화의 가치가 새삼 부각되는 시점이었다.


평화란 무엇인가? 아기 예수가 탄생하기 전 하늘의 천사들은 노래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이들에게 평화가 임하리라”


평화는 전쟁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전쟁이 없는 화목과 존중과 섬김이 있는 관계이다. 그러나 작금의 전쟁을 정의한다면 연대가 없고 화합이 없고 존중함이 깨어진 상태라 할 수 있다. 전쟁을 발발케 한 나라는 폭력과 비인도적 행태와 극악한 이기주의를 표출했다. 그러나 비록 수세에 있는 약소국은 지금 세계와 연대하고 지원과 기도를 받고 있기에 여기에서 평화의 싹을 본다.


과연 세상이 구하는 평화는 현실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전쟁이 없는 상태인 휴전, 냉전, 핵 포기, 핵전쟁발발금지 협약, 경제적 교류와 상생 번영, 문화 번성과 문명의 발달, 세계적 연합과 연맹 관계 유지를 말함인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우방들이 왜 직접 참전을 하지 않는가? 자국의 군인들이 피 흘리기를 원하지 않기에, 혹은 참전국이 감당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이 크기에, 혹은 세계대전으로 확전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일까? 나라마다 계산하고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기 나라 국민들의 평안이 깨어지고 일상이 정지되고 평화를 잃어버릴까 두려워서인지도 모른다. 섣불리 전쟁에 뛰어들어 자국이 누리고 있는 평화마저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


예수 현존 당시는 로마제국이 전쟁으로 세계를 제압한 시기였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구가하며 로마의 지배 안에서의 평화를 강요했다. 이로 인해 항상 로마의 침략전쟁 소문을 들으며 살았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고통과 무너진 삶을 지켜보는 것이 그 시대 일상이었다. 


이에 더하여 이스라엘은 구약 종교에 얽매인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횡포를 당해야 했다. 예수는 피폐해진 심령과 희망이 사라진 현장을 보았다. 참 평화를 갈망하는 회중의 눈빛을 간파했다. 세상은 평화를 잃고 비로소 평화의 가치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웃과 마을과 나라 간의 화평을 구축하고 안정된 상태, 전쟁이 사라진 평화로운 세상을 우리는 원한다. 그런 정상적인 삶이 회복되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예수가 가르친 평화 혹은 평안은 시발점이 다르다. 평화는 우리의 내면에 근심이 없는 안정된 상태로 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한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고 한다. 이를 위해 투쟁하는 이에게 자신의 영으로 함께 하리라 약속했다.


이런 근원적인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 이 평화로 세상에 평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 평화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실현하며 사는 인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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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칼럼] 평화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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