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은둔의 빛살이 내 몸을 비출 때까지 나를 키워온 꿈 자락의 일단을 추슬러본다. 더께 낀 명상에 젖어 살던 뼈아픈 오착을 뒤덮기 위해 목하 눈물을 흘리는 나이고파 찬란한 노을을 매몰차게 탐닉하는 차였다. 변명이 통하지 않는 교만. 그 우울한 언저리에서 나의 불신이 빚은 참담한 붕괴였기에. 이르기를 처절한 토설. 딴에는 꺼림칙하고 메스꺼운 잔영일망정 가려워 스멀대고 근질거리는 겸허를 배우며. 핏발 어린 생채기마저 창백한 진실이었으니까.
 
  우리는 사실을 우회하며 살아가는 변경인. 하찮은 개인사의 객체로 전락한 무리들. 흘러넘치는 방랑자의 혼. 또 하나의 회상이 영그는 소리. 언제 적부터였나, 스스로의 빛깔을 잃고 헤매던 때는. 따라서 저마다 오롯이 양심을 파고들어 영적인 요체를 찾아 나설 때. 내닫는 객차에 실어 보낼 혼백의 노래가 아니었다면 세세토록 이어질 피눈물 나는 병적(病的)을 소상히 나열할 적기다. 찰라가 순간의 순간인 걸 알아차리는 데는 그만치 세월이 걸렸다.
 
  거룩한 온 누리의 피조물에게 애최 생명을 불어 넣어준 빛. 구릉진 벼랑에 기댄 당신에게 그 빛을 비춘다고 하여 무슨 두려워할 까닭이 있는가. 놀빛이 비치거든 수용하라, 아무런 조건도 달지 말고. 설사 병기어린 나신이면 어떻고 발가벗어 부끄러우면 또 어쩌랴. 어둑한 미명이 불끈 솟아오른 태양에 밀려 차츰 그 옹벽을 무너뜨리듯, 우리 또한 무르익은 노을을 통해 환멸과 동요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낼 절호의 틈새이기에.

  묵상(默想) - 언필칭 케케묵은 수상[默想], 그 뒤뜰의 매듭. 어느 해질녘 먹물을 닮은 나는 도통 사물을 향해 심한 역정을 내고 있었다. 아스라이 가물대는 봉우리의 꼭짓점, 그 후미진 첨탑에서 한 송이 꽃을 만났더랬다. 가슴 저린 아름다움을 맛보았기에. 과거보다 나은 건 나직한 음성으로 감추어놓은 사랑의 비밀을 알리는 일이었다. 기쁘나 기쁜 나날이 어찌 또 있으랴마는 노을을 자아 사랑의 옷을 만들고 노을을 짜서 사랑의 잔을 채우고 말리라.

  “오 주여, 노을을 사랑하듯 당신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싶나이다. 온 세상이 청초한 사랑의 홍수에 파묻혀 노을빛 사랑의 병균을 퍼뜨리고 싶나이다.” 아무런 후회와 회한 없이 착하고 청정한 세포로 남기 위하여. 나아가 정신에 배탈 나고 도덕이 쇠락한 채로 악의 덫에 걸려 넘어져 입은 상처를 어루만져 줘야하므로. 왜 그토록 속살이 에고 시리도록 고달픈 외로움으로 앓고만 살았는지 속속들이 알아야하므로.

  꼭두새벽 벌떡 일어나 아침놀 앞에 선다. 주위는 고적하고 곧이면 어둠의 자락이 잔뜩 나래를 부풀릴 참이다. 단언컨대 하늘은 너울너울 새까만 밤을 몰고 올 터였다. 옛이면 글 읽는 목청이 여리여리 들릴 법하고 고단한 다듬이질 소리가 쿵쾅쿵쾅 들릴 듯도 하건마는, 지금은 한낮의 희뿌연 안개가 걷힌 저녁나절, 주후 두 천년의 성상을 흘려보낸 어느 지구촌의 한 구석이다. 그렇게 땅거미 내릴 즈음, 노을의 표피에는 수많은 설화가 말없이 서성거렸다.
 
  그리 크지 않은 방죽을 끼고 자리한 시골 마을, 저만큼의 산들은 호젓하고 더욱 더 깊은 정적을 함유한 채 잃어버린 유년의 동화라도 들려줄 것만 같았으니까. 주체 못할 질풍노도를 겪으며 그리움과 미움의 실상과 허상으로 부유하다 맥없이 용해되는 주인공처럼 이리저리 헐떡이며 헤매던 곳에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깨끼고 부러지던 치기가 여태껏 추억처럼 뇌리를 감싸고도는 분토였었다. 할퀴고 물어뜯는 사자 앞에서 곧 허물어지던 내면이었으므로.

  심상(心想) - 굽이치는 심상의 영토. 일컫기를 사랑의 물결이 넘실대는 고향을 되찾은 거였다. 노을은 스치되 맞닿지 않은 듯 그렇게 성큼 대지를 뒤덮은 바였다. 난 거기서 신비한 감각으로 노을의 화성(和聲)을 들었고 환향(還鄕)의 즐거움을 주웠다. 설령 내가 맛본 참 사랑의 실체가 노을과 더불어 이룬 게 아니라 해도, 난 구태여 노을을 옭아매 나만의 소유로 삼으려 들지는 않았더랬다. 기실 그럴 만한 기력도 준거도 마냥 전무했기에.

  흩날리는 노을의 깃털. 내심 세차게 일어나는 조그마한 사랑의 불씨를 모았으니까. 어렴풋하나마 창발적(創發的)인 기쁨에 기여한 연유를 엿보았기에. 그러기에 노을은 호화로운 고대광실의 사치한 장식은 아닌 것이며, 오색 찬연한 옛 처마 밑 현란은 더욱 아닌 참이리라. 다만 어둠의 한 자락을 수놓던 아침 햇살의 결집이자 분분했던 한낮의 희미한 회상에 지나지 않은. 그래서 자칫 매정스레 내쳐버릴 여지조차 없는.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292호)에는 '노을 수상록 <5회>'가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자치돌이★ 기자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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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노을 수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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