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걸쭉한 소망의 구름다리. 피어오르는 사색(思索)의 연기가 걷히며 곱디고운 조망(鳥網)을 갈망했다. 무지갯빛 단풍에 물든 등산로. 그러나 새하얀 희망봉을 가린 절망이 깊이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숱한 인간을 파계(破戒)로 부추긴 자들의 소행이었다. 그 틈을 거친 자가 험상궂은 얼굴로 다가와 감쪽같이 감춘 파멸을 끈질기게 꺼내보였다. 피맺힌 아우성에 소름끼친 괴성으로 태고의 매듭을 세차게 풀어헤치며. 그칠 줄 모르고 헤매 도는 낙망의 골짜기. 그 늪에서 몸부림치며 허우적대는 군상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나 이 또한 은밀한 유혹에 곧장 타협한 꼴이라니 어쩌랴. 아, 나약한 양심의 볼멘 쾌감이여! 뒤집으매 향기로운 죄악의 찌끼가 부옇게 질린 심장에 시퍼렇게 박혀있었다. 바로 어수룩한 사탄의 기상천외한 궤계. 그 속성을 깨닫기 전 장대비로 피멍든 거리를 헤매던 소이(所以)는 또 무슨 아련한 감상이었는지. 차라리 한 줌의 풍치라도 움켜쥔 채 싱거운 추리소설쯤이나 훑어볼 일이거늘…….

  차가운 소망이 바야흐로 단잠을 깼다. 눈부신 아침 햇살에 활짝 핀 해바라기를 따내고는 화들짝 놀라서였다. 하지만 행여 나른한 권태와 풀죽은 우울의 둥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려는 날갯짓은 아니었다. 연일 진흙탕 쌈박질로 인해 찢기고 으깨진 골반이었거니와 하마터면 광대무변한 시공으로 사라질 뻔한 시심(詩心)에 휘둘렸으니까. 하긴 빛바랜 시편을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 생생히 되살아나기는 애당초 글러먹긴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움트는 서정의 우아한 속삭임이기를 어여삐 바랐더랬다. 언뜻 거칠게 기꺼운 환희였고 물색없이 소용돌이친 몸싸움이었다. 하여 홀가분히 품기엔 향리의 뒤뜰이 그나마 제격이랄까. 오붓한 그리움이 소리 없이 퍼지고 더는 노곤치 않고 더러는 사람의 향내가 잔뜩 스몄을 법하니까. 퍽 소소하되 뼛속 깊이 녹아든 방향제처럼.

  얽히고설킨 속박. 하지만 그 굴레가 왠지 싫지 않은 결박이라면서 깡그리 앙금이더라고 과연 열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까닭에 빛나는 소망은 후텁지근한 대류에도 사심(思心)하는 마땅히 명상이어야 했다. 돌아보니 모질게 이지러진 격랑 속에서도 트집 없이 발췌한 은총이었기에. 아닌 게 아니라 속살 비치는 동심이 미묘하게 뒤엉킨 이랑과 고랑을 이고지고 어떤 이는 치부하기를 가벼이 환해(宦海)의 오욕칠정이라 했고, 푸른 풀의 시인은 무겁게 유래 없는 지고(至高)의 지선(至善)이라고 설파했다. 설사 종교적인 종말을 두렵게 선고받는다 해도 지독할 만치 평온한 소망의 포만감만은 쉽사리 저버릴 수 없어서였다. 부풀은 망각의 넋이 질펀한 늪지대로 가일층 빠져들 무렵 미약한 사랑의 자취가 살포시 내려왔더랬다. 내 곤비한 양심의 수풀에 은신하고자 한편에서 꼼지락댔더랬다. 칙칙한 절망을 이기고 꿋꿋한 믿음의 줄기를 이어간 연고가 기실 엄연해서였다.

  이윽고 사각(思角)의 도가니에 뿌리내린 녹음방초. 오롯이 믿음의 반석을 딛고 올라선 사랑의 정화랄까. 그 눈부신 바람을 몽땅 거머쥔 채 이제야 나의 뇌파가 뇌리 한가운데 주춤주춤하던 참이다. 결코 생존을 담보한 아찔한 곡예 때문은 아니었다. 지겨운 좌절이 무시로 넘나들고 낯선 혐오에 짓눌린 나머지 불의한 불신에 압도됐을 뿐이다. 기어코 회색빛 질식이 목젖에 차올라 예까지 떠밀렸을 따름이다. 자꾸만 분출하려는 실핏줄의 외침. 아뿔싸, 검붉은 혈루(血淚)는 막 태어난 초태생을 마구 옥죄었고 그 초성마저 무참히 짓이겼다. 이토록 끔찍한 행태를 목도하고도 뭇 세인들은 애써 태연자약했다. 이르기를 더러운 죄악의 불길한 원조. 그러니 원죄의 가녀린 징표를 스스로 간직한 채 겨우 근근이 연명할 밖에. 자고이래 얼마나 많은 영들이 영벌의 구렁에 끼어들어 이름 없이 산화했던가? 그러나 우리네 영혼이란 영존하여서 비록 칠흑같이 그을릴망정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다. 설령 쌓고 쏟아 부은 의로움이 태산을 이룰지라도 십자가의 보혈을 말미암지 않는 한.

  이렇듯 사랑이란 하룻저녁의 모사나 시답잖은 수작 따위가 아니거늘 어찌 알량한 글 한 줄에 어쭙잖은 수사 따위로 타협하려 드는가? 이를테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합치야말로 순전한 교향악인 셈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 잉여를 잉태한 본성을 뒤로하고 늘 약고 얕게 진리를 일축하며 살았으니까. 거기서 비롯된 선악과를 매만졌던 초시의 두 남녀. 그것은 불결한 뇌물이었고 피어난 파약이었다. 미상불 거들먹거리던 최초의 죄악상. 절대 우상의 반열에 가로막힌 결행이었으되 지혜로울 만큼 탐스러운 욕망의 환각에 취해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마저 쉬이 범하려던 찰나였다. 언필칭 영생을 뒤늦게 들먹였건만 꺼지지 않는 탐욕의 분깃에 휩싸인 채 가물가물한 가로등에 가차 없이 가려진 때였으니까. 의뭉스레 하늘나라의 진리를 슬금슬금 들추면서. 되레 외식과 가식의 타성을 깨우친 게 현란했던 에덴의 어두운 교훈이었을까?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287호)에는 '나락(奈落)의 저편 <하>'가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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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나락(奈落)의 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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