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법화원 동남쪽에 우뚝 솟아 있는 적산명신(赤山明神) 조각상은 크기만 클 뿐 예술미는 전연 없었다. 해신상의 하나인 적산명신의 손 모양을 보니 바다를 다스리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형상. 말하자면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시도일진대 9,999개의 금불상들이 대웅전에 빼곡했고, 삼불보전에는 약불사, 석가여래, 아미타불을 만들어놓았다. 북쪽의 장보고 기념탑은 한민족회에서 장보고 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석탑. 우리는 전시관을 둘러보기 전 8m 높이의 장보고 동상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1학년 : 박주현, 강경훈, 장호준, 오찬석, 김연식, 이상혁, 한종훈, 김임성, 안형준, 유재승, 2학년 : 박준희, 김태균, 서상덕, 주선민, 박진우, 정효택(이상 16)과 부자(父子) 교사였다. 출생지조차 불분명한 장보고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호탕하고 의협심이 강해 바다와 어울렸고, 수영과 달리기, 말 타기 등 무예를 좋아하여 일찍이 소년 영웅으로 불렸다. 그러나 제아무리 출중한들 천출인 장보고로서는 출세할 길이 없었다. 당대 신라 정국은 진골 귀족들 간에 치열한 왕위다툼으로 혼란에 빠져있었고, 케케묵은 골품제도에 갇혀 진골 귀족이 고위직을 독점하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결국 장보고는 당나라 이주를 선택했다. 나당간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신라인이 당내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터. 삼국통일 이후 특히 능력 있는 6두품들이 유학길에 올라 100여 명을 넘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편승해 신라인들을 당에 노예로 사고파는 무리가 있었는데 바로 드라마 해신에서도 어린 장보고가 해적의 손에 넘어가 당나라 노예로 팔려 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해상무역왕으로 알려진 장보고. 세간에 그의 생애를 두고 왈가왈부하지만 어쨌거나 일세를 풍미한 인물이었던 건 적실하다. 서기 828년 장보고는 흥덕왕을 찾아가 서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던 해적들을 소탕하게 해달라고 건의한다. 이에 신라 왕실에서는 완도 일대 1만 명의 민중을 끌어 모아 진영을 설치하도록 조치하고 청해진 대사라는 직책을 부여한다. 도둑떼를 정리한 그는 이를 기반으로 당--일을 연결하는 해상무역 네트워크, 즉 중계무역뿐만 아니라 조선업과 제조업에도 손을 대며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중앙정계를 활보하던 김우징을 도와 신무왕으로 즉위시키는데 기여하면서 드디어 서기 838년 감의군사라는 칭호와 함께 2천 호의 식읍(食邑)까지 하사받는다. 그러나 김우징이 보위에 오른 지 6개월 만에 병으로 갑자기 승하하자 자신의 딸을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에게 차비(次妃)로 들이려던 계획마저 무산되면서 그의 정치적 위상은 일대 위기를 맞고 만다. 자녀들의 혼인마저 중앙 진골 귀족들의 완강한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천출의 벽을 뚫고자 반란을 일으켰고 845년 당시 통일신라 정부는 그를 제압할 수 없었기에 이듬해 자객 염장을 시켜 암살하기에 이른다. 851년 결국 청해진은 폐지되고 그 주민을 벽골군으로 강제 편입하면서 장보고의 해상왕국도 쓸쓸히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장보고의 정신은 중국의 한편에 살아있었다. 정성껏 지은 전시관의 건축술은 당조의 풍격을 따라 웅장한 기세. 5개의 전시실에는 장보고가 당조의 무령군에 들어가면서 적산법화원을 건립하고 해적을 무찌른 이야기부터 해상 무역 발전에 공헌한 역사를 아우르고 있었다.

  요약하면 제1실에는 대당추몽(大唐追夢)’으로 영웅이 된 소년이 당조문화의 영향을 받고 입당한 배경을, 2실에는 무령종군(武宁从军)’으로 장보고가 무령군(당나라 군대 단위)에 몸을 담기까지의 경위를, 3실에는 원정적산(缘定赤山)으로 법화원 건립의 과정을, 4실에는 청해부침(清海沉浮)으로 청해진의 생성과 소멸을, 5실에는 원원유장(源远流长)으로 장보고 기념탑 건립, 법화원 중건, 한중문화교류와 무역왕래의 실태를 소상히 밝혀 놓았다. 이나마 기행문을 쓰는 원천은 다른 팀의 가이드를 좇아 해설을 들었기 때문이다. 눈 아래 보이는 건 장보고 기념탑(세계한민족연합회에서 1994.7.24. 건립). 아쉽게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를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연못이 있는 후원을 돌아 원형문을 통과하며 느낀 소감은 명승지를 꾸미는 중국인의 재주가 한국보다 몇 수 위라는 사실.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이처럼 빈틈없이 다듬고 가꾸는 데는 많지 않다. 음력 8월 보름이면 신라인들이 위해에 모여 명절을 보냈다니 감회가 새롭다. 한중 수교 후 위해시 당국은 우월한 지리적 위치를 활용해 한인들의 투자를 이끌어내면서 한국의 후원[后花園]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가이드가 던진 몇 마디 가운데 귀담아 들은 건 여성들을 절대 우대한다는 생활풍습. 바깥일을 나가든 안 나가든 가사는 남정네가 전담하다시피 한다는데 잘 믿겨지지 않았다. 호텔을 겸한 번듯한 식당에서 잘 차린 점심을 들고 국제여객터미널로 향하는 길. 가는 도중에 애최 구경하기로 했던 야생동물원을 발견했다. 매서운 날씨에 혹여 구경거리가 동났을까봐 급히 방문계획을 바꾼 터였다. 45일간의 여정. 출국수속은 역순이었다. 새해 벽두 뱃전에서 만난 서해대교는 그 위용이 여전했다. 정박할 때 보니 자선(子船)의 역할이 주효하다. 커다란 모선(母船)을 작다란 자선이 제어하다니 무척 신기하다. 기회가 오면 다시금 찾으리라. 가능한 한 자유롭고 질서 있는 진행에 일탈 없이 따라준 학생들이 퍽 대견할 따름이다.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에는 '소풍가던 날 <상>'이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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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중국 사제동행 '장보고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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