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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사는 이야기]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선한 마음의 봄날’ (1회)
    때 이른 봄꽃들이 이제 막 몽우리를 터뜨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예수님의 보혈로 새롭게 싹을 틔웠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이번에는 “믿음과 행함”에 대해 집중적으로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믿음은 삼위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을 가리킵니다. 행함은 그 믿음에 따라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말하고 실천하는 힘입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즉 보혜사(保惠師)를 말합니다. 창조주는 세 분이지만 동시에 한 분이라는 의미에서 삼위일체(Trinity)라는 신학 용어를 사용하지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즉 독생자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은 하나님이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낳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사람의 이름이나 어떤 낱말 앞뒤에 ‘갓-’ 또는 ‘-의 신’을 붙여 부르는 유행은 심히 우려스러운 풍조입니다. 성삼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문제는 발단은 믿음과 행함의 불일치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삼위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 채 교회에 드나듭니다. 참다운 신앙이 생길 리 없습니다. 깊은 믿음이 없으니 행실에 균열이 발생합니다. 물론 보이는 행동이 바르다고 하여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자는 아닙니다. 세상의 윤리도덕과 준법정신을 따라 얼마든지 올곧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위한 고도의 절제일 뿐 사람의 영혼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응당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알 리 없습니다.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간구로 시시각각 돕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릅니다. 스스로 추구하는 의로움은 한순간에 무너지는 사상누각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창조주를 향한 신의식이 없는 한 세상의 가치 체계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는 영적 논리입니다. 그렇다면 신행일치의 앞뒤는 자명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으면 행위는 자연스레 따라간다는 원리입니다. 언행일치 뒤에 신행일치를 이루는 게 보통이지만 믿음이 생긴 후 행함에 커다란 변화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줄기차게 교회는 다니는데 행실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실제 믿음을 갖고 있는지 점검해볼 일입니다. 이른바 믿는 척하며 교회당의 마당만 밟고 다닐 확률이 높기에 그렇습니다. 이 경우 본인이 잘 알겠으나 착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스스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지 들여다보면 됩니다. 양심을 속이는 자는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기보다는 사리사욕에 얽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생적으로 원죄를 안고 사는 인간이기에 이중적 행태를 포장하며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불행한 일이로되 세상이 어지러운 건 그래서입니다. 이런 지적을 두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더군요. 왜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분별의 영역입니다. 잘못된 사안을 바로잡기 위해 갖가지 법률을 제정하는 것처럼 성경 말씀이라는 잣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는 십계명이라는 율법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로 알려주신 말씀을 무시하는 자를 보고 어떻게 성도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뿐더러 하나님을 모르면 분별력이 흐릿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만드신 분이 삼위의 하나님이니까요. 단순히 오욕칠정의 속성이 아니라 그걸 마음속에 품고 죄악을 키우는 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니 불의를 보고 분노하고 바로잡겠다는 자유의지의 발로는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분은 꼭 필요한 감정입니다.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나설 때 주저앉는 태도야말로 악의 편을 드는 행위에 속하지요. 늘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리 혼탁합니까?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내로남불’ 때문이지요.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 관용을 베푼다면 사회는 한결 깨끗해질 것입니다. 그 일에 앞장서는 공동체가 교회여야 합니다. 내가 싫으면 남도 싫은 겁니다. 내가 좋은 걸 남에게 양보하는 게 실천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덕목입니다. 최대한 그 방향으로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삼위의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먼저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삶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성도의 필수 요소입니다. 가정에서 실천하고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면 복음은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오늘날 명목상의 교인들에 의해 교회로 향하는 뭇 발걸음이 가로막혀 있거든요. 뼈아프게 회개할 대목입니다. 그 사역에 결단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2호)에는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 선한 마음의 여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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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5-06
  • [세상사는 이야기]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하나의 본보기’ (하)
    필자가 선보이는 성경에 관한 서평은 지면 관계상 신약의 일부를 소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성경은 구약(Old Testament)과 신약(New Testament)이라는 2개의 언약, 즉 구약 성경 39권과 신약 성경 27권(합 66권)의 책 가운데 총 1,189개의 장에 도합 31,173개의 절과 773,692개의 낱말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책들은 약 1500년간에 걸쳐 40명 가까운 사람들이 각각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신약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따르면 모든 성경의 내용은 일개인이 구상한 창작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대표적인 저자로는 구약에서는 모세가 있고, 신약에서는 바울을 들 수 있다. 신약 성경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역사서(사도행전), 바울 서신서(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일반 서신서(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유다서), 예언서(요한계시록)가 그것이다. 신약 성경은 대략 서기 45년경부터 서기 95년경까지 코이네 헬라어(공통 헬라어, AD 1세기 그리스의 일상어의 형태)로 표기되었다. 4권의 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의 출생과 33년간의 삶에 이은 사역 및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크게 충돌하지 않는 네 가지의 기사를 알려줌으로써 예수가 어떻게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인지를 드러내면서 신약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왕으로서의 예수, 마가복음은 종이 된 예수, 누가복음은 인간으로 강림한 예수를 공관복음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고, 요한복음은 창조주로서의 예수를 조명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예수가 가르친 제자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열두 사도는 예수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세상에 파견한 사람들이다. 바울 사도가 쓴 서신서는 특정 교회에 보내는 편지로써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그에 따른 실천 항목을 알려준다. 일반 서신서는 추가적인 가르침과 그 적용으로써 바울 서신서를 보완하고 있다. 사도 요한이 남긴 계시록은 종말 시대에 일어날 사건들을 고도의 상징과 비유적 언어로 예언한 기록이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개관하는 목적은 서양사의 중요한 대목일뿐더러 인문학을 이루는 요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의 실체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유의점은 성경 번역이 애초에 문어체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필자가 보는 개역개정(개역한글 교정본)보다 쉬운 새번역이나 현대인의성경을 권한다. 성경의 창세기를 읽고 적은 독후감은 다음과 같다. “내가 성경책을 처음 접한 때는 취학 전이었다. 엄마를 따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면서 자연스레 자그마한 신약 성경을 손에 쥐었고, 한글을 배워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때부터 조금씩 읽어나갔다. 다소 어려운 창세기의 설교를 듣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한두 해가 지난 뒤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문장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쫓겨났다는 얘기만 반복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로 인해 원죄가 생겨났다는 뜻을 알 리 없었다. 창세기 50장이 모세 오경에 속한다는 설명이나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인명과 지명에 질려 노아 홍수에 얽힌 바벨탑의 숨은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거쳐 애굽 총리가 된 요셉의 일생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뒤돌아보니 성경의 맥을 제대로 짚어준 주일학교 교사는 아예 없었다. 인간은 성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져 원래 영생하도록 만든 존재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참이다. 첫 남자인 아담은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붙일 만큼 지혜로웠다. 그를 돕는 배필로 지어진 여자가 이브였다. 최초의 부부는 완벽한 조건에서 스스로 창조주라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었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금하시며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를 내리신 터였다. 그러나 뒤늦게 깨닫고 보니 이는 축복이었다. 동산 중앙의 그 나무를 볼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어야 했다. 뱀으로 둔갑한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였다. 죄로 물든 부모가 낳은 아이는 유전 법칙에 의해 대대로 죄인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바로 원죄였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1호)에는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 선한 마음의 봄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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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4-28
  • [세상사는 이야기]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서평의 작성법’ (중)
    그렇다면 책을 평가하는 요소에는 무엇이 있으며, 왜 중요할까? 그것은 독자들에게 쓸만한 선택지를 제공함으로써 그 책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다. 서평자에게 해당 책의 가치를 발굴할 책무가 일정 부분 주어진 참이다. 즉 독자에게 책의 조망권을 보장하는 차원이다. 먼저 갈래(장르)와 더불어 제목의 의미를 소개하면 된다. 소재부터 제재를 거쳐 주제로 모아진 제목을 역으로 추적할 필요가 있다. 책의 표제로 내세운 뜻을 추상화의 과정으로 축약한 것이 제목이기에 그렇다. 목차라는 설계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건 그래서다. 차례는 책 전체의 조감도인 셈이다. 그다음에는 책의 내용을 쉽게 요약해주되 머리말, 본문, 마무리를 통해 대주제를 이끌어가는 저자의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 대개는 이 부분에서 작가의 공헌도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은이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면 자연스럽다. 저자의 이력을 통해 전문성을 확인하는 절차 또한 독자들에게는 중요한 지침이니까. 책을 출간하게 된 동기와 배경에 이어 읽기를 권장하는 연령대별 명시 또한 챙겨야 한다. 간단히 출판 사항, 즉 출판사명, 출판 연도, 분량(쪽수), 책의 질적 형태(양장본 여부)를 곁들임으로써 소장을 원하는 이들을 배려하는 일도 자상한 서평의 요건이다. 서평에서 착안할 지점을 꼽으라면 책을 향해 따스한 눈길을 주되 매서운 설득력으로 독자와 소통하는 데 주안점을 두라고 주문하고 싶다. 첫째는 가독성(可讀性)이다. 글이 쉽게 읽힐뿐더러 그 뜻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때 가독성은 높아진다. 시조시인인 필자의 경우 3·4조의 운율미를 충분히 활용하는 편이다. 첨가어인 우리말의 특성상 명사와 조사의 조합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어절이 서너 글자이기에 그렇다. 그만한 길이에서 읽는 이의 호흡은 차분해진다. 그 대목을 가리켜 시가의 운율을 이루는 기본 단위, 즉 음보(音步, 소리 걸음)라고 이른다. 홑문장과 겹문장의 조화 역시 중요하다. 문체의 적합성에 따라 이해도가 달라진다. 간결체나 만연체, 강건체나 우유체, 건조체나 화려체를 선택하는 건 글의 갈래와 내용에 따라 구분할 문제다. 가능한 한 수동태(피동태)는 지양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둘째는 객관성이다. 무엇보다 정확한 내용을 전달할 책임이 평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과장이나 비약을 포함한 왜곡이나 폄훼는 절대 금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는 논리성이다. 호소력 있는 전개라야 독자를 설득해낼 수 있다. 논리를 풀이하자면 전제로부터 결론에 이르는 합리적 과정을 말한다. 논지를 풀어가는 앞뒤에 모순이 없을 때 독자를 끌어들일 힘을 갖게 된다. 넷째는 명확성이다. 특히 어휘의 이중성에 유의해야 한다. 모호한 말은 시적 자유를 제외하고는 허용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누구든지 남달리 획기적인 비책을 바란다면 필자는 대뜸 ‘동어반복 회피의 원리’에 유념하라고 이르집고 싶다. 늘 지시어와 유의어 사용에 인색하지 말고, 자칫 남발하기 쉬운 접속어를 최소화하라는 요구다. 필요할 때 과감히 성분을 생략하는 버릇도 유용하다. 소주제를 중심으로 뭉치는 단락(문단) 구분의 원칙은 같은 생각의 덩어리에 기초해야 한다. 다섯째는 유효성이다. 시종일관 일관성 있는 관점과 해석(비평)의 기준은 일정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전체 주제를 향한 단원별 통일성을 견지하는 게 관건이다. 여섯째는 책무성이다. 근거 있는 비판과 퇴고를 통해 사후의 이의제기에 대비해야 한다. 글을 고칠 때 추가, 삭제, 재구성의 3요소를 익힌다면 완성도는 그만치 올라가기 마련이다. 서평의 서술 방식에서 주어, 목적어, 서술어의 호응 관계를 바로잡고, 표현과 구성의 적합도를 높이는 작업은 맹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가령, ‘책은~읽힌다, 저자는~하고 있다, 주인공은~보인다, 작품은~평가할 수 있다’는 정도면 적절하고, 강(장)점은 ‘~돋보인다, 뛰어나다’, 약(단)점은 ‘~낯설다, 한계로 보인다’는 기술(記述)이면 절제감을 더한다. 구성비율은 저자 10~15%, 조망 20%, 내용 30% + 해석 30%, 추천대상 등 5~10%이면 균형감을 준다. 끝으로 필자에게 효율적인 글쓰기 대책에 관해 조언하라면 매일 아침 가정 예배를 통해 성경을 묵상하고 다독, 다작, 다상량(多商量)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쓰기를 습관처럼 몸에 배게 하려면 매사 기록하며 주제 일기부터 시작하는 게 관건이다. 관심 있는 분야의 꾸준한 독서와 아울러 봉사·견학·여행 등을 통해 글감을 쌓아나가야 한다. 사물을 보는 날카로운 시각과 애정 어린 시선이 글을 잘 쓰는 요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0호)에는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 하나의 본보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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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4-22
  • [세상사는 이야기]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독서의 중요성’ (상)
    정보화 사회에서 독서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영역이다. 독서는 어떤 일을 하거나 연구할 때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거나 기본적으로 필요한 배경 지식(schema)은 물론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적 능력, 즉 지혜를 얻는 데 필수적이다. 오늘날과 같은 격동하는 시대 상황일수록 시시각각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자료를 섭렵함으로써 간접 경험의 장(場)을 활용하지 않고서는 시행착오를 예방하기 어렵다. 번득이는 문제의식을 갖고 순발력 있게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독서를 통해 분석력과 종합력을 향상시켜야 대안을 도출할 수 있다. 효능감 있는 독서는 사안을 푸는 해결력, 사람을 보는 안목,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독서를 권장할 때마다 시공을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닌 고전(古典)을 추천하는 이유다.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높이 평가되는 고전은 best seller, million seller, steady seller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실 멀리 내다보면 일시적으로 잘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보통 10만 권 이상)나 꿈의 숫자인 백만 권을 넘겨 팔린 밀리언셀러보다는 꾸준히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가 훨씬 나은 경우다. 그만큼 오랫동안 철저히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잘 아시다시피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가 무려 4억 권의 판매 부수를 기록했고,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중국의 <마오쩌둥 선집>은 그 두 배인 8억 2천만 권이 팔렸단다. 그러나 놀랍게도 출판업계에 숨겨진 실적은 따로 있다. 지구촌에서 해마다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는 책은 바로 성경이다. 작년 11월 6일 현재 39억 권을 넘어섰다는 나무위키의 통계를 보니 올해 40억 권에 이르는 건 시간문제다. 왜 그럴까? 성경은 감히 누구도 제시하지 못한 영혼 구원에 관한 정답을 죄인들에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종의 불편한 진실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것을 복음(福音, Good News)이라고 부른다. 그 연장 선상에서 독서 전문가들이 신중하게 선정한 필독도서목록에 적힌 책들을 단계별로 완독해내는 일은 각자에게 주어진 숙제다. 모든 일에 깔끔한 뒤처리가 따라야 하듯이 책을 읽은 뒤에는 독후감을 쓰는 과제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있다. 그런데 이번 특강의 주제는 한 걸음 더 나간 서평 작성법이다. 서평과 독후감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전자와 후자를 대비해보면 보다 선명해진다. 서평은 객관적인 성향을 띠는 데 비해 독후감은 주관적인 경향을 띤다. 전자가 논리적이라면 후자는 정서적이다. 서평은 이성적이고 독후감은 감성적이다. 앞엣것은 관계적인 데 비해 뒤엣것은 일방적이다. 서평은 외향적이고 독후감은 내향적이다. 전자는 설명적인 데 비해 후자는 감동적인 서술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서평(書評, a book review)은 책의 내용과 가치를 평가한 글, 즉 객관적인 정보를 말하고, 독후감(讀後感, impressions of a book)은 책을 읽고 난 뒤 느낌, 즉 주관적인 감상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의 사이를 멀다고 할 수는 없을 거 같다. 굳이 의인법으로 비유하자면 성격이 다른 형제자매간이나 사이가 좋은 이웃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좋은 서평을 쓰는 데 필요충분한 전제조건은 무엇일까? 우선 일목요연하게 요약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책을 읽으며 줄거리를 파악할 때 밑줄을 그으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군데군데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면 여러모로 유리하다. 응당 책을 너무 아끼면 곤란하다. 장별, 단원별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기록장은 필수다. 인간의 망각곡선은 생각보다 금세 바닥을 치는 법이니까. 따라서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아이디어를 저장하지 않은 채 훌륭한 글을 남기기는 매우 어렵다. 흔히들 던지는 질문 가운데 독서법에 관한 것들이 있긴 하지만 정독이 힘드니 속독을 어떻게 하냐고 캐물어 봐야 그에 대한 대답은 자명하다. 내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곳을 골라 읽는 발췌독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느냐부터 소리 없이 묵독할 때가 있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낭독할 때가 있다. 그중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으나 이 또한 이해력, 즉 글을 행간까지 읽어내고 쓸 줄 아는 문해력(文解力)에 달려있다고 본다. 공들여 정성껏 쓴 서평을 호평이나 혹평이냐에 관계없이 공론화할 것이냐의 여부는 최종적으로 본인이 결정할 문제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9호)에는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 서평의 작성법’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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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4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성경은 구원의 약속’ (6회)
    우리네 인생은 저마다 주어진 달란트를 노자 삼아 떠나는 자유여행이다. 그 가운데 지혜문학이야말로 생의 지축이 흔들릴 때마다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지침서다. 상처 많은 일생을 통해 곁에 두고 읽을 지혜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은 무한한 축복이다. 당신이 주님의 자녀라면 영혼의 잘됨을 인도하는 탁월한 길잡이를 최대한 활용할 일이다. 특히 양날의 칼 같은 언어를 조심하라는 것이 잠언의 숱한 타이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결같이 훈계를 싫어한다. 지혜를 버리고 스스로 어리석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고귀한 삶을 영위해야 마땅하건만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나 점점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해 가는 연유가 바로 가까이에 있다. 그러기에 잠언은 누차에 걸쳐 가르치며 경고하는 것이다. 예컨대, 미련한 계집의 초청에 응하면 망하는 길로 접어든다,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거부하는 자의 종말은 빤하다, 하나님의 미움을 받고 살아날 자는 하나도 없다는 데도 굳이 이를 거부하는 선택이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참이다. 악인이 되지 않는 길은 의외로 그리 어렵지 않다. 단순히 지혜로운 권면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돌아서면 된다. 자기 멋대로 방탕하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덧 악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선하게 살려면 언제나 지혜자의 명철을 사모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그중에 으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주옥같은 말씀을 부지런히 섭렵해야 한다. 더불어 후대에 가르쳐 함께 지켜내야만 한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시는 분께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기에 그렇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창조주 앞에서 무언가를 숨겨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매한 일이다. 전도서 7장 29절의 말씀 그대로,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 없이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행위다. 그것을 깨닫는 일이 최고가는 이성이다. 훈계가 되는 잠언을 지킨다면 우리의 삶은 빛나는 지혜로 넘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변화할 수 있다. 지혜문학 열차에서 내리며 깨달은 지혜는 명백하다. 잠언에서 추구하는 지혜의 세계는 인간을 존중하는 사상이다. 사람을 천시하고서는 슬기를 터득할 수 없다는 법칙이다. 지혜문학의 어휘 속에 담긴 내용의 핵심이 심판의 필연을 강조하는 연유다. 창조주가 주신 권능을 극대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시기가 목하 오늘이라는 외침이다. 하나님께서는 공평무사를 주문하시는 이유다.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지혜문학 전반에 흐르는 지혜의 총합이다. 하나님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특별한 능력을 쏟아부으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공명정대한 규칙 속에서 심령의 내면을 일일이 감찰하신다. 맡은 바 책무를 겸허히 감당하라는 것이 주님의 변함없는 가르침이다. 지혜로운 말씀을 경청하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고이래 창조주께서 주시는 교훈을 멀리하는 자에게는 그 해악이 삼사대까지 미쳤거니와 오직 말씀에 근거해 살아갈 때는 대대로 천대까지 구원을 받게 된다는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지복(至福)의 비밀을 값없이 알려주신 참이다. 하지만 즐거움에는 반드시 절제가 따라야 한다. 주신 능력의 남용은 필연적으로 판단력의 마비를 가져온다. 유혹의 올무에 걸려들지 않는 지혜는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섭렵할 수 있다. 여타 종교에서 주장하는 마음의 제어는 내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참된 지혜요 공적 정의이기에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신중한 말이 긴요한 바는 그래서다. 조리 없는 불필요한 논쟁은 십중팔구 다툼을 유발하므로 경계하라는 경고다. 책망은 그 유익을 심사숙고하여 우회적으로 시도할 일이다. 그러니 충고는 먹히는 곳에 시와 때를 따라 권고함이 슬기다. 인간인지라 근묵자흑(近墨者黑)하다 보면 멸망의 길로 함께 휩쓸려 가기 십상이다. 범죄하는 자와 어울리면 같이 죄를 짓게 마련인 것이 인간사회의 한계적 상황이다. 하나님의 법정에 서서 나의 알량한 선행을 운운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위는 없을 것이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전도서 17:27)”라는 말씀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 솔로몬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하나님 앞에 가감 없이 자복했다. 인생의 허약함을 고백하기 시작한 터였다. 회복에 대한 확신의 섬광이 잠자던 욥을 일깨운 참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우리의 차지가 되었다. 의롭다고 하셨기에 드디어 의인일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바였다. 살아온 세월에 대한 탄식과 절규는 비단 욥이나 솔로몬의 몫만은 아니었다. 천상에 먼저 간 다윗이 그랬고, 바울도 그러했다. 뒤늦게나마 지혜의 가치를 알아가는 사람들의 행보가 의미심장한 이유다. 성도는 깊고 높은 회개의 사다리를 통해 절대 순종을 배워야 한다. 순수한 복종 뒤에 주신 것은 아낌없는 축복이었다. 그 끝점에 영혼 구원이 있다. 그분의 주권적 통치에 동참하는 것만이 인간들이 애써 실천할 덕목이다. 젊디젊은 날에 위로부터의 슬기를 터득하여 주어진 달란트만큼 열심히 살다가 말년에 자손들에게 은혜를 전수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다. 이슬처럼 사라져갈 인생의 도정에서 감지하는 창조주의 사랑만이 지상최대의 행복을 담보하는 첩경인 것이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나의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여정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8호)에는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 독서의 중요성’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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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4-07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은혜로 얻은 지향점’ (5회)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잠언, 욥기, 전도서를 통한 지향점은 인간의 영적 지혜에 있다. 세 권의 책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쓰였다는 것은 자명하다. 인생을 어떻게 잘 경영할 수 있는가? 인생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갑자기 닥치는 재난은 어찌 대처할 참인가? 그 상호작용의 관계를 힘써 정리하고자 한다. 지혜문학에서 다룬 주제는 모든 인간에게 절실한 자양분이다. 응당 솔로몬(아굴과 르무엘 포함)과 욥에게 영감을 주신 주관자는 성령님이시다. 그 말씀에서 위로와 평강을 얻지 못한 이는 없다고 본다.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인간은 언제나 삶의 등불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전도서에서 추구하는 바를 일견 비관주의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필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욥기에서 읽히는 축복을 극구 설명해보라고 요청한다. 더구나 잠언 기자가 기술한 악의 창궐을 저주의 길로만 해석하는 관점에도 반대한다. 의로운 길에 영생이 있다고 믿는 것이 핵심이다. 어떤 경우든지 사후보장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막장이다. 잠언과 전도서의 관계를 두고 창조적 긴장이라고 주석을 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참다운 지혜는 창조주의 은혜를 깨닫는 데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이 최상의 지혜다. 현재의 고통에 어떤 반박을 가하든지 성도의 태도는 결연해야 한다. 외식을 유난히 싫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행위 이전의 동기를 중시하시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문체는 언뜻 잠언서에 나오는 격언체의 그것과 구별이 안 가는 이유다. 무상감을 극복하는 길이 이생에 있지 않고 내생에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고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일부 현상에 대해 회의하는 사색까지 색안경으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인생의 어두운 면은 보상적인 지혜와 결코 상극에 있지 않다. 이 또한 전도자의 눈높이와 불일치하는 측면이기는 하되 인간사를 관조하는 면에서는 참고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관심사는 늘 우주적 질서가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었고,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의 과학마저 하나님의 뜻에 종속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현인일수록 자신들이 추구하는 실존적 안정에 대한 신의 최종적 거부권을 존중했다. 삶의 현안에 대한 주요 수단으로써 기능한 것이 이른바 유비(analogy)였다. 유비(類比)는 유비추리의 준말로써 서로 다른 사물 간에 대응적으로 존재하는 유사성 내지는 공동성을 뜻한다. 그들은 적절한 유사를 대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고 보았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것이 목표를 이루는 하나의 방법일지언정 목표 자체는 아니라는 맥락에서 잠언을 검토해야 한다. 그 주제 분석을 통한 필자의 의사는 간단명료하다. 창조주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한 분이시라는 대전제다. 명제는 역사적으로 인간에게 있었다. 따라서 고난사는 어제와 오늘만의 일이 아니라 내일도 계속될 일들이다. 다름 아닌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에서 연유한 의심과 욕심에 기인한다. 바로 이 양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누릴 복락을 차버리고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둬가시기도 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의심 없이 욕심을 버리고 감사로 받아쓰면 족하다. 누리면 고마운 이치를 끊임없이 싸우고 다툼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영육 간의 빈곤을 자초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기획하는 진보와 퇴행마저 여호와의 최종적인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 거기에 우리가 절대자를 시험할 권리는 전연 없다. 우리의 한계는 늘 하나님께 두는 소망이어야 한다. 그분은 끝까지 우리가 가지는 일편단심을 보신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전개 방식이다. 토기장이를 향하여 나의 존재를 따지는 어리석음을 당장 집어치워야 한다. 그러한 결단과 현명함을 그분께서는 언제나 기뻐하신다. 신앙이란 차갑든지 뜨겁든지 둘 중의 하나일 뿐이지 그 완충지대는 없다. 그 사잇길에는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을 따름이다. 이는 비단 잠언, 욥기, 전도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말씀에서 일관성 있게 제시하시는 길이다. 불협화음의 원인은 늘 인간에게 있었다. 정답은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어려울 때일수록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예고편이자 경고등이다.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기에 그렇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자를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자녀의 복된 위상을 누리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매번 언급하듯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 가장 시급한 현안이다. 이 창조 신앙이 흐려질 때 신을 향한 경외심이 풀어진 모양새로 나타난다. 차마 불경스럽게도 여호와의 주권이 낡았다는 식의 위험천만한 발상이 불거지는 참이다. 지혜는 창조주만이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의 깊이를 가졌는데 말이다. 생명을 부여하는 자에 대한 찬양은 세세토록 있어야 하고, 생명의 선물로서 영생을 받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세세토록 감격해야 한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욥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답변은 축복을 배나 더한 완전한 회복이었다. 통상적으로 평온한 국면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경향이 짙다. 이때 주의할 점은 욥이 당한 고통은 누구라도 당하면 주신만큼 이겨낼 수 있는 증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를 마치 자신의 시험처럼 생각한다면 분명 교만이다. 복권되기 전까지의 태도까지를 보신 하나님은 복의 복을 예비하셨다. 육적 소유를 갑절이나 더해 받은 것의 영적 의미는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 하늘나라의 수단과 도구일 뿐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7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성경은 구원의 약속’이 이어집니다.
    • 시민광장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3-31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솔로몬이 깨달은 것’ (4회)
    솔로몬의 회고담을 두고 일견 가소롭다고 느낀다면 심오한 인생의 이치를 전혀 깨닫지 못한 소이(所以)다. 전도자가 허무를 통해 알리고자 하는 주제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근인(近因)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의 사치가 덧없어도 좋으니 단 한 번만을 부르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전도자는 매사에는 때가 있다고 일갈한다. 그때를 어김없이 지키는 일이 창조주에 대한 순종이라고 역설한다. 하나님만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인정할 때라야 영리한 사람이 된다는 경종이다. 창조자 앞에서 겸허하게 수긍하는 젊은이의 지혜가 시급하다고 목청껏 외치는 이유다. 전도자는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처절하게 후회한다. 잘못된 사연들을 보고도 왕으로서 바로잡지 않은 일을 두고두고 한탄한다. 뒤늦게나마 소외된 계층을 외면한 죄가 큼지막함을 깨닫는다. 두루 만연한 악의 요소를 왕이었던 자신이 부추겼음도 상기한다. 재삼 범사에는 때가 있음을 알아야 했다고 땅을 친다. 막강한 힘을 가졌던 자신이 주어진 사명에 극히 불충실했다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전도자는 무엇이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깨닫고 나서야 크게 뉘우친다. 자신의 젊은 날에 영적 지혜가 없었음을 개탄한다.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쇠하는 원리를 망각한 처사였다. 하나님의 주권을 송두리째 이해하지 못했다고 자인한다. 초기에 받았던 슬기로움을 여태껏 회복하지 못한 탓이었다. 죄악사의 종점은 파멸이라는 철칙을 몰랐을 리 없었다. 평범한 진리가 비범한 지혜임을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세계를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미처 알 수 없었기에 부단한 기도가 필요한 참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속히 깨닫는 것이 진정한 지혜다. 과다한 번뇌야말로 마귀가 주는 간계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근심이 죄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깨달음이다. 살아 역사하시는 창조주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묵묵히 따라가라는 가르침이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 12:1)는 대속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명령이다. 전도서는 가치 있는 인생에 관한 탐구서다. 우리에게 태생적 원죄로부터 겸허함을 배우라고 요구한다. 잠언처럼 여호와를 경외함이 원초적 순종이라고 이르집는 사유다. 창조주의 경영에는 시종일관 통일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물질과 비물질을 아울러 전 통치영역을 섭리하신다. 이를 두고도 인간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그 하나는 배타적 경건주의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 자율주의다. 솔로몬의 음란한 행각을 보면 얼마큼 의문이 풀린다. 처첩을 무려 천 명이나 둔 그였다. 당대의 문호 개방은 괄목할 만했다는 평가는 더욱 세속적이다. 무역업은 성황을 이뤘고 나라는 풍요를 구가했다. 세간의 관심사는 온통 타락한 지식이었다. 날로 수수께끼 형식의 풍자에 익숙해지면서 낯선 비유들이 한껏 기승을 부렸다. 사람마다 상투적 우화를 즐기는 통에 저마다 식상한 격언을 들먹였다. 특정계층의 지적 독점으로 인해 진리가 왜곡될 만치 불합리한 상대성이 산처럼 쌓여갔다. 그들이 간직한 신앙적 유산의 순수성은 급기야 외부로부터 유입된 이방 문화에 오염되고 만다. 비진리가 진리에 승하는 순간 멸망하는 지름길로 치닫는다는 인류사를 보여준 실례였다. 전도서는 인간의 말초적 사안들을 치밀하게 추궁한다. 살아온 인생을 향하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라는 되뇜은 인간이 무얼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적실히 보여주는 일갈이다. 자칫 인생무상으로 비추어지기 쉬운 질문은 자신을 향한 통회 어린 자복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제아무리 선행을 실행한다고 해도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서는 허무를 체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늘 정직한 관점을 주문하시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삶을 경영하는 도정에는 절망의 표지들이 끊임없이 순환할뿐더러 결실 없는 탐구에 휘둘려 인생의 궤도를 제어 불능상태로 몰아갈 수 있다고 일러준다. 그 지점을 파고드는 말씀이 전도서 1장 8절이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내세워 인간존재의 유의미한 섭리를 확언하셨다. 전도서에 대한 분분한 의견들을 듣노라면 부질없는 논란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의 초점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곧 영접을 촉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반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헛됨의 반대개념으로 영원한 가치를 선물하셨다. 새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린 삶의 종국을 허무로 규정하신 참이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도서 11:9) 더 나아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도서 12:13~14) 이보다 더 경종을 울리는 말씀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불신한 상태에서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도서 12:12)라고 타이르신 연유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7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은혜로 얻은 지향점’이 이어집니다.
    • 시민광장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3-24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욥이 뛰어넘은 시험’ (3회)
    욥기는 창조주의 절대 주권에 관한 일대 천명(闡明)이자 길흉화복에 대한 근원적 응답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기 1:1)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선언적 지점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당대 의인을 자처하던 욥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시험은 그만치 가공할 충격이었다. 그에게 덧씌운 고난은 원초적 신앙을 검증하는 각본이다. 가정의 행복이든 물질의 부요(富饒)든 간에 그것은 절대자의 권역일 뿐, 일개인의 의지적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는 확증이다. 응당 의인은 단 하나도 없기에 우리는 욥을 만드신 분께 항의할 근거는 아예 없다. 정금처럼 나올 것을 예비하심으로 인해 현재의 극심한 고통을 변론하거나 상쇄할 근거조차 없다. 그저 죽음을 구걸하는 자 앞에서는 천국마저 보이지 않는 언약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상대적 의인에 속했던 욥에게 불어닥친 고난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 배우자마저 그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그가 소생하여 재기할 소망은 거지반 없어 보이는 국면이다. 욥을 울린 세 친구를 통해서는 온갖 요설(饒舌)의 위험성을 연신 경고하고 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욥의 순전하지 못한 믿음을 추정한다. 남이 미처 모르는 욥의 불의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해댄다. 욥도 사람이기에 자조적 한탄을 시작한다. 기세가 오른 친구들은 무서운 죄의 결과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런 사태가 올 수 없음을 들어 마구 을러댄다. 그러나 욥은 쉽사리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예상이 빗나가자 친구들은 욥을 에워싸고 약을 올린다. 그들이 토설하는 현장에는 온갖 궤변만이 난무한다.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결정적 장면이다. 겉으로 내보이는 동정은 우월한 감정에서 나오는 한낱 위장일 따름이다. 예수그리스도가 돌아가신 십자가 형틀이 적나라한 현장이었다. 친구의 파멸을 재촉하려는 가면들 속에서 내 모습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두고두고 풀어가야 할 숙제인 셈이다. 범상치 않은 욥의 위대성이 그 순간 번득인다. 의로운 욥이 회개를 떠올린 터였다. 욥은 곧바로 세 친구를 위해 간구한다. 우리가 호소할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뿐이다. 타락한 천사의 궤계마저 창조주의 의도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말씀은 퍽 흥미롭다. 땅을 두루 살피다가 돌아온 사탄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피조물처럼 장담하신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마귀의 대처는 예상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기 1:9~11) 하나님의 대답은 다소 의외이셨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기 1:12) 사탄은 잔혹할 만큼 욥의 일가를 난도질했다. 욥기를 묵상하며 그때마다 간구하는 제목은, “오 주님, 이와 같은 일은 욥 하나로 족하나이다!”이다. 필자가 주목한 바는 창조의 비사(祕史)이다.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욥기 26:7~12)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욥기 28:25~26)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 또한 그는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느니라.”(욥기 37:10~11) 창조주께서는 끝으로 욥에게 물으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 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욥기 38:4, 38:18, 38:36~38) 글자 그대로 창조 사역의 비경(祕境)을 보았다. 고난과 죄의 문제는 꽤나 난삽(難澁)한 데가 있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실험 삼아 시험하셨다고 단정한다면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만다. 적실한 것은 욥 또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 역시 원죄의 사슬에 묶여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였다. 욥의 위로자를 자처한 세 친구는 저마다 자신들의 자랑을 드러내는 데 바빴다. 욥과 친구들이 벌이는 신랄한 논쟁은 그들을 자칫 그릇된 곳으로 빗나갈 수 있었다. 벗이라는 알량한 명분에 갇혀 하나님의 의를 재단하는 죄악을 저지를 뻔했다. 영적인 깨달음 없이 행하는 욥의 의로움 정도로는 한 줄기 빛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이윽고 욥을 향한 하나님의 답변은 축복을 더한 회복이었다. 따라서 욥의 단말마적 고통을 일회성 시험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교만이다. 소유를 갑절이나 받은 욥의 선물은 천성으로 향하는 과정이었다. 이미 구원받은 영혼을 더하면 자녀의 숫자는 아들 열넷과 딸 여섯이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5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솔로몬이 깨달은 것’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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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7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잠언은 일용할 양식’ (2회)
    잠언은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딱 한 달이 걸린다. 해마다 12번씩을 반복하다 보면 말씀에 인(印)이 박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물론 말씀을 묵상하는 일 못지않게 체화(體化)하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필자의 경우 잠언 말씀을 읽고 출근하는 날이면 까다로운 일을 제법 슬기롭게 처리하여 스스로 놀랄 때가 있었다. 잠언의 영적 가치를 품고 부지불식간에 지혜로운 사람을 닮아간 터였다. 이는 나의 생생한 체험담이다. 지혜란 관념 속에 머무는 공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어느 구절인들 허투루 지나칠 리 없겠으나 잠언이 주는 지혜가 하루 24시간을 오롯이 감싸고 돈다는 증거다. 오래전 글을 풀어가는 작법(作法)을 가르치며 대뜸 잠언 읽기를 추천한 제자가 떠오른다. 그 속에 오묘한 진리가 숨어 있으니 깊이 깨달으리라고 확신했다. 들리는 만큼 말문이 터지는 어법처럼 읽히는 만큼 필력이 샘솟는 바는 순적하다. 유태인들의 지혜문학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지적 자산인 셈이다. 우리 민족 역시 많은 속담과 금기담(禁忌談) 같은 비유를 통해 격조 높은 격언이나 금언을 적잖이 갖게 되었다. 간결한 관용구를 구사해 다양한 사실관계를 풍자나 교훈으로 넌지시 이르집는 지혜를 일상에서 배우는 기회다. 나아가 촌철살인(寸鐵殺人)을 연상할 만치 사물의 요긴한 데를 겨누어 듣는 사람을 감동하게 만드는 구실까지 엿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우리 속담에서 조물주의 존재가 흐릿하다는 점은 심히 안타까운 대목이다. 애초에 신인식(神認識) 자체가 없었던 게 아니고 원래는 있었는데 유사 이래 수많은 자료나 증거들이 거의 전부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놀랄 만한 지점도 있다. 기독교 재단의 각급 학교에서 사용하는 종교 교과서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었다. 이미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 중에 불국사 근처에서 십자가상이 출토되었다는 전언이다. 그것이 왜 국사편찬위원회의 소수 의견에 그쳐 한국사의 중대사로 인정받지 못했는지 의아스럽고 아쉽다. 앞으로 더욱 철저한 검증을 거쳐 종교 전래사의 하나로 자리를 잡기를 열망한다. 잠언의 내용은 히브리 청소년들을 훈계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근면과 정직을 필두로 효도와 신의를 비롯해 경건, 소망, 사랑, 그리고 믿음 등을 가르친다. 그 정점은 슬기롭게 삶을 경영하는 데 있다. 그 구절들을 일일이 들출 수는 없더라도 곳곳에서 인간 본연의 미덕이 묻어나는 건 동서고금의 공통점이다. 이는 부모로서 자식을 훈계하는 일침들이 추상같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통상적인 철학서와는 접근법부터 다르다. 단순한 예절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근본을 파헤치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잠언 1:2~5)라고 규정하고 있다. 잠언 1장 7절을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라고 단정한 것은 전체 말씀에 대한 대전제에 해당한다. 잠언을 관통하는 수사법은 시종일관 대조법이다. 훈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의인이요, 계명에 거역하는 자는 악인이라는 프레임(frame)을 주저 없이 선포하고 있다.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라는 말씀(잠언 2:10)과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네 길을 지도하신다는 언약(잠언 3:6)과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언 4:27)는 충고 등이 그것이다. 음란을 경계한 비유는 감탄을 자아낸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잠언 5:15, 5:18) 음녀에 관한 구절은 줄줄이 나온다. 곧바로 6장부터 뒤쪽 여러 장(11, 20, 22, 27장)에서 보증에 대해 훈계한 점은 단연 압권이다. 필자는 특히 8장 36절에 주목한다.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공들여 9장부터 언급하는 화두는 거만한 자를 향한 화살이다. 10장의 주제는 게으름과 부지런이다. 11장에서는 속이는 저울추와 공평한 눈금을 보는 잣대에 과녁을 겨누고 있다. 잠언의 전개는 선행자와 행악자의 궁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5장 1절의 권고는 금과옥조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16장 1~2절은 이를 뒷받침한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응당 악인과 선인의 보응은 오롯이 주권자의 영역이다. 18장 22절은 유독 눈길을 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술꾼들을 압도하는 구절은 여럿이다.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잠언 23:20),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잠언 23:29~30) 잠언 전체를 요약하면 크게 권선징악, 신상필벌, 사필귀정의 주제 아래 생명에 관한 정답을 실시간으로 제시하고 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4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욥이 뛰어넘은 시험’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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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3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슬기로운 자의 행보’ (1회)
    창조주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지혜(智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삼위의 하나님은 사람들을 슬기롭게 지으셨다. 지혜는 지식(知識)과는 다르다. 지식의 범주가 이론에 있다면 지혜는 실천의 영역이다. 사전적 의미에서의 지식은 교육이나 경험, 또는 연구를 통해 얻은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를 말하고, 지혜는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적 능력을 가리킨다. 지식이 다소 현학적(衒學的)이라면 지혜는 다분히 호학적(好學的)이다. 지식이 자신의 박학다식(博學多識)을 늘어놓는 데 비해 지혜는 다방면의 해박한 정보가 없어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다고 지혜가 어떤 처세술 따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혜는 실용적 중용(中庸)보다는 철학적 원리원칙을 중시한다. 지혜자의 언행이 일치하는 바는 당위(當爲)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아름다운 세계관을 갖기 마련이다. 성삼위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지혜자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축복을 시시때때로 누리며 살아간다. 창조주께서 주신 말씀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 슬기다. 지혜가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른다. 그 말씀을 일상생활에 적용함으로써 경건한 삶을 살아낸다. 성경 말씀 안에는 온갖 지혜와 보화가 들어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혜 있는 자는 말과 행동을 삼갈 줄 안다. 지혜자는 매사 절제되고 품격있는 언행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혜의 세계를 알고 즐긴다. 어떤 경우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일수록 유한한 슬기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기술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 지혜자는 무의식적인 상태에서도 결코 그릇된 길을 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을 좋아하신다. 창조주를 사모하는 자들이 받는 지혜를 축복이라고 부르는 근거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생령(生靈)을 지으신 원천이 바로 지혜다. 그 영역을 벗어나 슬기롭게 살아갈 존재는 세상에 없다. 영적 존재인 사탄마저 끝내 하나님을 대적하는 까닭이다.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갈림길은 결국 축복과 저주로 드러난다. 말씀을 믿고 붙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선을 주시니 감읍한 일이고, 말씀을 거부한 채 곁길로 빠지는 자에게는 기도가 절실한 참이다. 그 종착역에 영생의 비밀이 숨어 있다. 지혜의 목적이 정반대로 나타난 결과는 오롯이 사람들의 몫이다. 천사도 부러워할 만한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를 주신 결단은 실로 은혜다. 심지어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각자의 자유의지로써 믿도록 설계하셨다. 엄연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자유까지 허락하신 것이다. 다만 그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돌아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신 까닭이다. 미처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거부하는 영혼들까지 참고 기다려주신다는 결정적 증거다. 하지만 기회는 목숨이 붙어있을 때가 유효기간이다. 모든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되기를 애타게 바라시되 그마저 결정권은 각자에게 위임하신 터다. 문제의 근원은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언 1:6)라는 말씀을 수용하지 못한 연고에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뒤 인간을 지혜롭게 만드셨다. 이른바 모세 오경을 통해 친히 모든 지혜를 일러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이 지혜의 총합이다. 십계명을 목숨처럼 지키는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힘써 지키지 않는 자는 어리석었다. 요셉과 다니엘이 받은 축복 가운데 으뜸이 바로 지혜였다. 모세와 다윗 또한 지혜로운 자의 전형이었다. 그들은 탐욕으로 빚어진 분쟁을 잠재우고 갈팡질팡하는 무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 다만 연약한 인간이었기에 지혜롭지 않은 행실을 죄다 물리치지는 못했다. 그들마저 자유의지를 선용하지 못한 결과였다. 역사상 위대한 사람들일수록 자유의지를 선용했다. 자유로이 즐기는 권리는 그에 상응한 의무를 수반한다. 창조주께서 부여하신 엄청난 권한이기에 책임이 따른다. 기실 그 권세를 엉뚱한 데 쓴 최초의 인간은 아담과 하와였다. 그 부부가 저지른 우매함으로 인해 죽음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죄의 속성이 자자손손 유전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나님께서 정녕 그와 같이 예고하셨기 때문이다. 지혜롭지 못한 인간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창조주 하나님을 경홀히 여긴다. 그런 뜻에서 교만의 반대는 겸손이 아니라 불신이다. 불신앙이 인간들을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해버렸다. 구세주 예수님께 전심으로 구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지혜인 줄 모른다.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영혼을 지으신 까닭이다. 그러나 세계관을 바꾸는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애타게 찾는 자들에게 양문을 여시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멀리하는 데 기인한다. 자신 안에 감춰져 있는 지혜를 모르는 건 당연하다. 지혜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태부족한 것도 한 원인이다. 우리 안에 지혜가 이미 주어졌음에도 저마다 꺼내서 사용하기를 주저한다. 아예 지혜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각자에게 허락하신 슬기를 찾아내라고 주신 성경 말씀이 바로 지혜문학인 것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3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잠언은 일용할 양식’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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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4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신령한 처소를 찾아’ (5회)
    그로부터 칠 년 후, 드디어 독립된 서재가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잘 나가는 가게처럼 신장개업한 서가는 명실공히 나의 지식을 쌓고 다듬는 공간으로 터를 잡았다. 주거환경으로서는 목이 좋다는 곳으로 이주한 뒤 한없는 감사로 젖어 있던 그때 에벤에셀의 주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신학을 공부하도록 인도하셨다. 책장이 두둑해지며 영적 허기를 느끼기 시작한 지점이었다. 때가 차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께서 부족한 부분을 돌아보게 하셨다. 막상 신학의 문에 들어서니 거대한 학문의 성채였다. 세상의 어떤 학문도 신학 앞에서는 한없이 왜소해질 수밖에 없을 만큼 드높아 보였다. 학기에 학기를 더하며 위를 올려다보니 바라볼수록 높다란 장벽을 실감해야 했다. 그래서 아덴의 고대 철인 중에는 철학을 일컬어 ‘신학의 시녀’라고까지 고백하지 않았던가. 세기의 석학들이 제아무리 인문학을 거론하며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을 들먹여도 신구약 성경을 능가하지 못한다. 아니 인간적으로 탁월할수록 감히 범접하지 못할 창조 사역의 비밀이 녹아있기에 그렇다. 유한한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계시(啓示)의 기원을 전지전능한 신께서 몸소 열어주신 참이다. 신학의 길은 멀고 험했다. 아직은 일천한 배경지식 탓에 제대로 된 신학 논문 한 편을 완벽히 소화해내는 데도 남모를 시련이 따랐지만, 바지런히 이 책 저 책을 들추며 기웃거려보는 특유의 버릇만은 여전했다. 춘부장의 서가를 정리하는 동료 교사에게서 관련 서적을 트렁크에 가득 실어온 적도 있었다. 이러구러 첫해와 이듬해 수집한 신학 서적이 기대치를 넘어 칠백여 권에 달했으니, 모두가 예수님의 놀라운 은총이 아니면 무엇이랴. 이 또한 남들이 보기에는 책에 대한 과욕으로 비칠 수 있는 대목이라서 퍽 조심스럽기는 해도 뒤돌아보면 나는 세간에서 평가하는 책 수집상은 될지 몰라도 훌륭한 장서가의 자격은 갖추지 못한 게 확실하다. 여하튼 대강 정돈하여 세어본 총 장서 수는 어림잡아도 삼천오백 권을 훌쩍 넘긴 듯했다. 웬만한 동네 서점에 온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떠는 제자들을 보낸 뒤 사뭇 흐뭇해하던 연초의 기억이 뇌리에 생생하다. 나의 서재에 꽂힌 책들은 그렇게 긁어모은 거였다. 얼마 전에는 새로운 장서수집의 대원칙도 수립했다. 앞으로 몇 년간은 더 이상 숫자를 늘리지 않고 불필요하다고 확신하는 책들과 신간들이라도 과감히 정리해 나갈 결심을 굳힌 것이다. 어떻게 모은 책들인데 단 한 권인들 집 밖으로 내치듯 떠나보내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신중히 솎아낸 책들은 그냥 내다 버리는 게 아니라 필요한 곳을 찾아갈 것이므로 안심해도 된다. 이윽고 눈에 비친 나의 서가는 내심 새로운 모습으로 정화를 바라고 있다는 걸 스스로 눈치챈 소이(所以)였다. 그 원칙에 따라 여태껏 수거한 책들이 줄잡아 오백여 권은 족히 되지 싶다. 그간 서재 한쪽에서 밀려난 책들은 다른 방으로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츰 방바닥까지 잠식해 오는 걸 본 다음에는 결정을 더는 미루기 어려웠다. 향후에는 더 엄선해서 살 책을 고르고 손에 쥔 책은 반드시 읽고 소화하는 데 집중할 요량이다. 두고두고 참고할 게 아니면 곁에 남겨두는 데 치중하지 않고 남들에게 선물하든지 기부하는 일에도 눈을 돌릴 생각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서재에 걸맞은 이름을 짓는 일이다. 길게 고심할 것도 없이 나의 아호처럼 대나무를 닮겠다는 뜻에서 <죽향재>(竹向在)라고 붙였다. 대쪽 같은 성품을 본받는 존재로 우뚝 서고 싶어서다. 내 깜냥은 모자랄지언정 자신을 비운 채 하늘로 곧게 뻗어 올라간 자태를 지향할 참이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처음 이사 와서 우리 네 식구는 오붓이 서재에 둘러앉아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어언 아들딸이 장성해서 가정을 이루고부터는 아내와 단둘이 식탁에서 경배를 드리게 되었다. 서재가 다시금 신령한 처소로서 의미를 되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감지해낸 터였다. 총 삼천여 권의 책들 가운데 채 삼 할도 안 되는 구백여 권만을 겨우 읽어낸 참기 어려운 지성적 가벼움을 영적으로 숙성시켜 나갈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서재를 번듯하게 겉으로 꾸미고 가꾸는 데서 벗어나 마냥 책을 향한 사모의 정만을 앞세우지는 않으리라. 그리하여 허기진 육신을 요기하는 서고가 아니라 영혼 구원에 필수적인 믿음의 양식을 공급하리라. 그렇게 영적 내실을 다질 때 참 신앙의 풍요를 누리며 내게 주어진 지복(至福)을 향유할 수 있으리라.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2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슬기로운 자의 행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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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2-17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지적 탐색기에 들어’ (3회)
    그러나 쌓인 책의 무게로 인생의 부채가 탕감되는 건 아니었다. 연달아 실패한 대학입시를 지레 포기할 수도 없었다. 가정 형편상 학원에 등록하지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았으나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운 시간은 흘러가는데 막상 만회하라는 공부는 등한히 한 채 목표로 잡은 건 교과서가 아니었다. 장르별 문학 서적을 위시해 사회를 심층 분석한 시론(時論)에다 동서양의 철학서까지 알량한 독서목록에 등재해 놓았다. 무슨 대단한 독파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 지병처럼 앓던 내용 공포증을 얼마큼 떨쳐낸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중에 이해가 쉽잖은 사상서를 통해 사고의 깊이를 더했다. 그해 일기를 자주 챙겼던 덕분에 공영방송에 보낸 독후감이 채택되어 인기작가였던 최인호로부터 저자 서명이 담긴 두 권의 책을 받아들고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입시정보를 캔답시고 <진학>이라는 월간지에 나온 대학들의 면면을 훑어보느라 정작 본고사는커녕 예비고사 대비도 게을리했으니 여전히 나의 장래는 안갯속이었다. 대학의 관문 통과에 매진할 시간에 그토록 한눈을 팔다니, 돌이켜보면 창조주를 잊고 나댔던 나의 과거 행적은 한심한 투기적 노름이나 다름없었다. 가까스로 지방의 한 유서 깊은 대학에 들어서자마자 영장이 날아들었다. 오백 여권의 책을 뒤로하고 입산한 병영의 시계는 실로 끔찍한 체험의 연속극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한 치 앞을 분간하기조차 힘겨웠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멘탈(mental)에 붕괴가 올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길바닥이나 도랑에서 주운 흙 묻은 신문지[舊聞]를 몰래 주머니에 구겨 넣어 재래식 화장실에서 쭈그린 채 읽기를 시도할 만치 엄혹했다. 부당한 구타와 대접 등 말하지 못할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동해안 경비를 맡은 말단 소대(소초)에서 최고 사령부의 본부대까지 치고 올라가며 복무하는 동안 작전참모부에 차려진 군사도서관을 떠맡았으나 그렇다고 차분히 앉아 독서에 임하는 일은 감히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하루하루 생존하기에 급급한 인간 군상의 이기심들로 인해 허덕이듯 절망하며 바싹 움츠러들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제대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한 병사의 소망은 주님의 은혜로 무사히 이뤄지고, 차가운 겨울을 집에서 따뜻하게 보낸 복학생은 베드로 광장이 정갈한 독일식 기독교대학 캠퍼스로 귀환했다. 북적이는 대학 강의를 섭렵하는 데는 전연 무리가 없었다. 첫 학기 성적이 좋아 중앙도서관의 지정석까지 얻어 장학금을 타내던 참에 여기저기 낙후된 공공도서관 시설에 눈길이 갔다. 주로 대도시에 산재한 대학도서관을 제외하고는 후진국형 열람실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서관학(요즘은 문헌정보학으로 개칭)이라는 전공을 택할 때만 해도 남달리 학구열이 불타올랐는데 지금 와서 반추해보니 교정 안에서의 책 모으기는 생각만큼 진척이 없었다. 그래도 만만찮은 생활비를 쥐어짠 끝에 150권짜리 문고본을 장만했고, 몇 개 시리즈물과 전공 서적 수십 권 정도만 서가에 꽂을 수 있었다. 역시나 문제는 취업난이었다. 전두환이 발호하던 1980년대 전후 유가 폭등으로 몸살을 앓던 경제가 해마다 곤두박질을 쳤기에 쉬이 따놓은 줄 알았던 남자 사서직마저 기약이 요원했다. 게다가 학점은 좋으나 평소 관계 형성에 소홀한 이력에 점수를 깎아 먹는 바람에 빈자리는 어느새 예뻐 보인 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서울의 미션스쿨에 자리가 났다는 통보를 받은 건 춘삼월 막바지였다. 하지만 지역사회의 지식안내자를 자임하려던 나의 포부가 무모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불과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직 운영 전반의 체계화를 이루지 못한 곳에서 내가 할 수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일단은 따분한 일상을 타파하기로 계획했다. 서둘러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길러도 한편으론 아직 봇짐을 정리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 그대로였다. 일간신문을 펼치니 한 대학도서관의 사서직 공채 시험 공고가 눈에 띄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 통지를 받은 뒤 연봉 협상에 미심쩍은 데가 있어 허락을 받고 하루 출근해보니 내가 반평생을 걸만한 곳은 아니었다. 타개책은 공부를 계속하는 길이었다. 졸업 후 학교도서관에 심기로 약속한 이름 없는 사서 선생의 소명감은 훨씬 열악한 악조건들 앞에서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깊은 고민 없이 거꾸로 주독야경의 터널을 빠져나오기로 결심했다. 나는 애당초 구상했던 국어교사의 길을 향해 늦깎이 편입을 결행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0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영적 감지기를 맞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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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2-11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영적 감지기를 맞아’ (4회)
    천여 권의 책을 짊어진 채 시동한 국어국문학이란 학문은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오후 네 시에 시작해 밤 11시에 끝나는 직장 일을 병행하고서도 나는 높은 학점을 받았다. 적성에 들어맞는 학업의 진전은 괄목할만한 지적 성과로 나타났다. 하지만 턱없이 모자란 수면의 질량으로 급격히 시력이 나빠져 안경을 써야 했다. 나는 전공과 관련한 책들을 모으는 재미로 종로서적과 교보문고의 재고 코너와 할인매장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줄기차게 발품을 팔다 보니 가뜩이나 비좁은 전세방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제집 장만도 못한 주제에 참으로 유별난 취미를 가졌다며 수군댔을지도 모른다. 고마운 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치열한 관문을 뚫고 곧바로 교육대학원생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추동력은 평온한 가정이었다. 아내의 내조에 힘입어 졸업논문을 쓰는 일에 집중했다. 세 명의 동기 가운데 홀로 석사학위를 마무리한 것은 주님의 은혜였다. 어렵사리 시작한 나머지 대학 2년과 야간대학원 2년 반까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수학 연한이 남들보다 뒤로 밀리기는 했어도 얻어낸 열매가 결코 작지 않았다. 허송한 세월을 따라잡아 보았고 맞이할 미래를 앞당겨 다져보았다. 그해 겨울 나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 전세에서 새집으로 옮긴 환희는 기대 이상이었다. 서울을 떠난 책의 숫자만도 이미 나 혼자서는 짊어지기 어려운 천 권을 넘어섰다. 난생처음 마련한 내 집의 구석방에 바라던 서재를 꾸미기로 했다. 농부 겸 목수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손을 빌려 칸칸이 번듯한 서가를 세웠다. 누가 봐도 멋들어진 새 책방을 번듯하게 마련한 터였다. 얼마나 고대하던 나만의 서재였던가. 고대 때는 지금이다 싶어 잽싸게 고향 집 구석방에 쟁여놨던 서책들을 공수했다. 한 달에 걸쳐 책 정리를 마치고 나니 남부럽지 않은 서재가 위용을 드러냈다. 제법 주제별 배치까지 고려한 듯 쳐다볼수록 흡족하기만 했다. 책에서 나는 냄새가 옛날 가마솥 누룽지처럼 구수했다. 한 칸 한 칸 서가를 채워가는 재미가 이토록 쏠쏠한지 미처 몰랐다. 내 명의라야 달랑 집 한 채가 다였지만 농부가 땅뙈기를 늘려가는 기분이 흡사 이럴 거 같았다. 솔직히 빈 서가를 메우는 마음만치 책장을 넘기는 보람을 느꼈는지를 되돌아본 계기였다. 그런데 왠지 가슴 한쪽이 허전했다. 바야흐로 영적 감지기에 접어든 참이었다.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릴 예배당을 찾은 건 그때였다.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다시피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반경을 한껏 넓혀 오산에서 천안까지 훑고 다녔다. 아침저녁으로 가정예배는 드렸지만 영안이 열리기 전이어서 목회자들이 극구 감추는 데까지 훤히 꿰뚫기는 어려웠다. 쏟아지는 교재 연구에 가르치기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 서적 읽기를 늦춘 것은 영적 침체를 불렀다. 그중 직장 내 신우회 모임을 통해 어느 정도 도움은 받았으나 그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성경 주석서를 접할 수 있는 호기(好機)였는데 성과 없이 끊겨버린 것이 아쉬움을 남겼다. 그나저나 장서 이천 권이 되려면 지혜와 지식을 녹여 만든 세월의 지층이 좀 더 켜켜이 쌓여야 했다. 그 틈에 어렵사리 마친 아내의 방송대 수학 덕분에 가정학에 관련된 책자가 백여 권 늘어난 것은 흐뭇한 지점이었다. 그렇게 몇 년간은 유의미한 장서 확보에 소강상태를 보였다. 요즘 들어 뼈저리게 느끼는 건 지속 가능한 일이라야 주목할 만한 성취감을 담보한다는 원리다. 그때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기 때문이라며 변명 아닌 설명을 애써 해대고는 있지만 실은 뭔가 지적 허기를 느꼈던 건 사실이다. 확실한 주제 없이 살아온 열기로 인해 태부족한 소일(消日)이 그 까닭이었다. 한사코 털어놓기를 주저한 터여서 여태 분출하지 못한 지성적 에너지원이 거르지 않은 잉여물처럼 심연에서 들끓고 있었다. 그래도 그 시절 산책과 등산의 그윽한 묘미를 알아차린 건 천만다행이다. 물론 방이 하나 더 있는 큰집을 마련하기 위한 초 긴축가계운영도 책꽂이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답적인 취향이 멀리 달아나 버린 건 아니었다. 꼭 필요하다고 분별한 책들은 시와 때를 따라 곤궁을 면할 만큼은 사서 읽은 편이어서 굳이 수집 형태만 놓고 본다면 도리어 바람직한 형태로 바뀐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기실 유능한 장서가들을 보노라면 다 읽은 책이나 더는 묵히기 아까운 책들을 흔쾌히 기증하고 있으니 말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1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신령한 처소를 찾아’가 이어집니다.
    • 시민광장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2-10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손에 들어온 전집류’ (2회)
    재밌는 것은 뜻하지 않게 생긴 횡재(?)에 고마움을 느낀 대상이 결단을 내린 모친보다는 돈을 번 그 아저씨로 뒤바뀐 국면이었다. 비록 내게 수시로 분풀이를 해대던 탓에 인격적인 야속함이야 있었을망정 오늘날 나의 서재를 형성해준 일등공신이 일벌레 어머니라는 데는 별 이의가 없다. 생계를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들판을 돌아다니며 농부들에게 책을 소개하던 그 책 장수를 두고 ‘책 보급 왕’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겠다는 뜬금없는 발상을 하며 이따금 빙그레 웃곤 한다. 이는 책다운 책이 내 옆에 둥지를 튼 첫 번째 사건이었기에 이렇게 길게 서술이 늘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책 오십 권은 이후 실상 내 손을 많이 타지도 않았다. 그로 인해 부모님께 실컷 받은 지청구도 한몫 했지만 책들을 만지느라 도통 교과서하고는 사귈 생각을 하지 않는 데 있었다. 촌뜨기의 좁아터진 시야에 비해 거창한 독서계획을 세운 것까지는 퍽 가상한 일이었으나 관심 없는 난해한 내용에는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 지적 성장의 화근으로 작용했던 참이다. 먼 훗날 뒤늦게 철이 들어 그때 정황을 곰곰이 헤아려보니 세계문집으로 인하여 나는 일종의 ‘접근 장애성 내용 공포증’(필자의 명명)을 앓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그토록 읽어내고자 공을 들였던 책자 중에는 괴테의 명작 <파우스트>가 있었다. 아직 변변히 한국문학에도 딱지를 떼지 못한 주제에 그런 대작을 펼쳤으니 기껏 더딘 판독에 의미 파악인들 무슨 진척이 있었겠는가마는 그때 내게 생긴 난삽(難澁)한 책자에 대한 두려움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딱지가 지고 떨어져 고맙게도 고무라기처럼 아물었다. 알고 보면 그 증세는 머리를 싸맬 게 아니라 대충 넘어가도 상관없는 사안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내용이 필요 이상 어렵고 산만하다 싶으면 잠간 어떻게 껄끄러운 부위를 고쳐볼까 들여다보다가 이내 눈앞에서 치워버린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청소년들에게 지식에 대한 고질적 내성으로 악화할 소지가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를 요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사실 나는 어릴 적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치 참을성이 있었다. 또래에 비해 내구력이 있었기에 자식 칭찬에 극히 인색했던 우리 집에서까지 나의 인내심만은 인정하는 편이었다. 자칫 심각한 문제로 키워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라는 조언이다. 오죽하면 신경질적인 어머니까지 “쟤는 죽은 다음 무슨 말을 하려나?”라고 핀잔을 주었을까. 박토에서 책을 통해 사색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불가해한 경사였다. 문제는 마냥 손을 놓고 현실성 없이 펼치는 상상력에 있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공상에 젖어 든 일상이 가져다주는 유익은 무엇일까? 잘못 박힌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격언의 경고를 무작정 불러들인 격이어서 되짚는 말이다. 이런 나의 증세는 중2가 되면서 엉뚱한 곳으로 번져갔다. 제대로 읽지도 않을 책을 마구잡이 수집하기로 작정한 터였다. 대관절 무엇에 쓰려는 심산이었는지는 몰라도 여하튼 나는 책이라고 생긴 것이면 다치는 대로 긁어 들이기를 즐겼다. 이런 취미의 최대 걸림돌은 응당 금전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웬일로 책만 사겠다고 조르면 의외로 후하셨다. 열 권을 사면 고작 한두 권을 읽어내는 판국임에도 사들이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아하던 그 심사에 대해서는 참으로 아리송하다. 지적 허기를 달래기 위한 일말의 몸부림이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이러구러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내 곁에는 약 삼백여 권의 책이 쌓였다. 월부책 사건 이후 자그마치 2주일에 세 권씩은 꼬박꼬박 책꽂이에 꽂아 왔던 셈이다. 푼돈을 모아 사들인 책치고는 어지간히 눈에 띄게 불어났던 참이다. 나는 그 시기를 ‘지적 탐색기’로 부르기로 했다. 떠오르는 대로 어렴풋이나마 세계문학전집을 기쩍이면 다음과 같다. 스탕달의 <적과 흙>을 비롯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세계단편문학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사르트르의 <구토>, 톨스토이의 <부활>과 <전쟁과 평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레마르크의 <개선문>, 에밀리 브론테의 <제인 에어>, 릴케의 <말테의 수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세계희곡선> 등이 맨 꼭대기 서가에 그대로 꽂혀있다. 깨알 같은 글씨가 누렇게 바래 고개를 쳐들고 읽어낼 만치 낡았지만 하나같이 소중한 추억의 서책들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9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지적 탐색기에 들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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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0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수줍게 들춰낸 편력’ (1회)
    척박한 가정에서 자란 소년에게도 꿈은 있었다. 어중간한 시골구석에서 태어난 탓에 세련된 문화적 혜택은커녕 문명의 이기라고는 아예 구경조차 못한 채 자라났어도 유난히 책 모으는 욕심 하나만큼은 남다른 데가 있어 가당찮게 나의 서재를 갖고 싶었다. 아늑하고 조촐한 나만의 공간을 꿈꾼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키운 가문이 대대로 서책을 쌓아놓고 사는 뼈대 있는 선비 집안이라거나 동양화 같은 산천경개의 가시권에서 뛰어놀다가 자연스레 생긴 고상한 취향은 더욱 아니었다. 그저 책같이 생긴 물건이면 옆에 두기를 좋아했고, 책장을 넘길 때 풍기는 탕내가 싫지 않아 생겨난 취미였다. 어린 마음에도 책들을 책꽂이에 꽂아 놓기만 하면 꽤 아는 게 많아질 것 같은 주제넘은 생각이 자주 들곤 해서였다. 그러니까 고매한 지적 대물림이랄 것까지는 아니로되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심리적 영향권이라면 그리 크지 않은 동네에 서당을 열어 간신히 호구(糊口)하시던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맞닿아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한자 글씨체가 훌륭하고 평생 성경책을 가까이하신 아버지 밑에서 보고 배운 점이 이어받은 삶의 여건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부친은 이웃들로부터 가방끈에 비해 한자 실력이 있다는 평을 들으셨다. 고된 들일을 마치면 안방 벽이나 마루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손가락과 발을 움직여 늘 글씨 쓰는 연습을 즐겨 하셨다. 그 모습을 접할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 중학교 한문 선생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곤 했다. 어쨌든 그럭저럭 선대로부터 대물림한 크고 작은 옥편이며, 굵은 실로 엮어 만든 누런 서책 수십 권이 내가 꿈꾸던 서재의 시초였다. 거기에 해마다 몇 권씩 보태는 거라고 해봐야 교실에서 사용한 교과서에다 가물에 콩 나듯 사보는 책들 몇 권이 거지반이었고, 교회에서 단체로 구입한 낡은 성경책이랑 어린이 찬송가 두어 권이 내가 소유한 책자의 전부였다. 보시다시피 서책을 사서 모으기에는 참으로 미약한 출발이었거니와 뜻하지 않은 곳이나 친인척에게 선물 받은 책을 집으로 가져올 때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기분 좋은 눈총을 심심찮게 받곤 했다. 오로지 마음속에 간직한 서가를 향한 한 가닥 소망만이 내가 지닌 환경적 불완전 요소의 돌파구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소작농의 맏이로 태어나 엄격한 기독교 율법으로 양육되고, 방과 후면 농사일 거들기에 바빴던 나의 어린 시절은 꼭 하고 싶은 말조차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살았기에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도심과 떨어진 읍내의 변두리 초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뒤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수업을 마치면 어김없이 호미를 들고 밭으로 향해야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 길을 오가는 것도 무척 고단했지만,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인 밭일은 언제나 피하기 어려운 과업이었다. 차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귀가하는 시간을 늦추는 바람에 심하게 혼쭐이 나기는 했어도 여전히 밤늦도록 거드는 일손만은 내게는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문제는 하루가 다르게 어려워지는 각 과목 교과서들의 내용이었다. 그 진도를 따라가기도 벅찬 마당에 갈수록 노동의 강도마저 세지다 보니 도저히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본격적인 공부의 맛을 미처 들이기도 전에 찾아온 때 이른 사춘기는 지레 지친 나의 심신을 사정없이 엄습해버린 터였다. 온갖 사물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도 가슴과 뇌리는 충만했건만 나만의 시간과 자유를 달라고 애원할 용기도 없이 무성한 풀 섶에서 풀이 죽어지내던 나날이었다. 그렇게 잔뜩 주눅이 들어 지내던 어느 날, 나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던 월부책 장수를 김매던 중에 마주쳤다. 서산에 해가 반쯤 걸린 밭이랑 사이에서 어머니에게 말을 건네던 사람이 있었다. 삼십대 중반쯤으로 뵈는 호리호리한 남자의 장광설을 엿들어본즉, 자녀를 위해서 '세계문학전집'을 꼭 사줘야 한다는 아주 애절하고 집요한 판촉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밭 한가운데 엎드려 있는 게 왠지 창피스럽게 느껴져 고개를 푹 수그리고 개미처럼 일만 하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불쑥 모기 만한 소리로, “야, 저것 좀 사봤으면 좋겠다!”라며 전에 없던 속내를 드러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냥 별로 기대하지 않은 채 지나가는 말처럼 던져본 말에 어머니는 대뜸, “그거 얼마래요?”라고 하시며, 무려 50권이나 되는 책 상자 3개를 선뜻 인수하는 것이었다. 이게 정말 꿈은 아니겠지? 나는 그때의 놀람과 설렘을 아직도 고스란히 가슴에 담고 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8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손에 들어온 전집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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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3
  • [세상사는 이야기]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영혼 구원의 섭리’ (4회)
    이번에는 지난날 제가 겪었던 시행착오들을 털어놓을까 합니다. 자연스레 ‘하인리히 법칙’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큰 재앙을 당하기 전에 작은 사고와 조짐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주장입니다. 1명의 사상자가 나올 경우, 그 전에 경상자가 29명 발생한 다음 비슷한 문제로 다칠 뻔한 사람이 300명이나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비율을 그대로 적용해 ‘1:29:300 법칙’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1931년 당시 미국 여행보험사의 손실통제 부서에 근무하던 하인리히(H. W. Heinrich)는 산업 재해 사례들을 분석하던 중 일정한 흐름을 발견했다는군요. 그가 쓴 <산업 재해 예방: 과학적 접근>을 통해 처음 알려졌는데요, 어떤 재해든지 우연히 생기는 게 아니라 반드시 이전에 여러 번에 걸쳐 사람들 앞에 경고등이 켜진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혀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제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개인사 역시 섭리하시기 때문이죠. 알고 보면 우리가 겪는 일은 죄다 개개인의 자유의지로 빚어낸 결과물이니까요. 크고 작은 일들이 죄다 나의 철없는 소행이었거든요. 제아무리 핑계를 끌어온들 언제나 내 소견대로 행하였고 끝내 고집을 피우며 되먹지 않은 결정을 내렸으니까요. 설령 어떤 손해에 누군가가 개입한 흔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건 늘 쓴 충고를 안 받아들인 어리석음이 끼어들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베푸신 은혜를 선용하지 못한 까닭이었죠. 따지고 보면 선악과를 악용한 하와를 탓할 까닭이 궁색해진 참입니다. 악한 의도인 줄 알고 따라간 아담 이후 자범죄의 대가로 치르는 형벌이니 말입니다. 죄인의 피를 물려받은 원죄 때문에 그 속성이 고스란히 유전되었거든요. 비록 중생했을지언정 평생 성화를 지속하는 이유입니다. 심히 부끄러우나 저의 나쁜 운전 습관을 고백합니다. 성격이 급한 탓에 막히는 걸 참기 어려워하는 편이거든요. 길이 훤히 열렸을 때 나도 모르게 과속을 하곤 합니다. 오래전 딱지까지 몇 차례 끊은 적이 있으니까요. 떠올려보면 정말 창피한 일들입니다. 내비게이션을 단 뒤로는 각별히 조심한다고 다짐해도 타고난 성정을 단박에 죽이기는 쉽지 않습디다. 이런 게 바로 죄성이로구나, 매번 추슬러봐도 뿌리 깊이 박혀있는 속성을 무리 없이 다스리는 건 여전히 저의 숙제입니다. 자그만 단체의 책임을 맡고 있을 때였어요. 왜 투명한 회계 처리로 구성원들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한 채 적당히 얼버무렸는지 후회가 막급입니다.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만큼 수치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내 것인 양 제쳐둔 일입니다. 나중에 정확히 계산하셨습니다. 소스라칠 만큼 감사한 일이었어요. 주님의 자녀이기에 중간결산할 수 있었으니까요. 유독 반복을 싫어하는 학습 태도로 인해 실패를 거듭한 과거사는 가슴 아픈 기억입니다. 다행히 퇴임하자마자 이어가고 있는 박사과정에서 그 취약점을 보완하느라 애쓰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 도달 가능한 목표를 정하고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실시간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은혜를 깨닫는 게 요체입니다. 교단에 머물며 다소 따분한 느낌이 들었을 때 앞뒤 안 재고 착수한 신학대학원 졸업을 바탕으로 침체에 빠질 틈새를 없애버린 결단은 퍽 잘한 일이었어요. 제 경험칙상 주저 없이 권면할 수 있습니다. 늦은 나이에 쏟아부을 만한 일거리를 찾으십시오. 출퇴근의 수고를 면제받은 덕분에 더욱 몰두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더라고요. 백세시대에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즐거움이 제법 쏠쏠합니다. 자신을 사랑할 열정이 남아있는 한 소망은 결코 말라붙지 않으니까요. 돌이켜보매 모두가 예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기에는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했고, 난산 끝에 출발한 대학 시절에는 곧 닥쳐올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어요. 지나고 보니 어렵사리 교단에 섰으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도 있었고, 가르치는 태도의 오만함이나 내용상의 오류에서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가장 후회막급한 지점은 끝내 풀지 못한 인간관계입니다. 흔쾌히 양보하고 듬뿍 손해를 보는 데 한참 인색했거든요. 왜 그리 미안하다는 말문이 더뎠는지 모르겠어요. 한마디로 복음의 비밀을 깊이 깨닫기 전 맞닥뜨린 갖가지 사안에 대한 판단력의 문제였습니다. 모쪼록 살면서 걸림돌에 걸리거든 우선순위를 정해 슬기롭게 넘어가되 그때마다 열쇠를 쥐고 계시는 주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굳건한 신앙은 시련이 닥칠 때 오히려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7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수줍게 들춰낸 편력’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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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6
  • [세상사는 이야기]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영혼 구원의 사역’ (3회)
    오늘도 어김없이 맞이하는 새날입니다. 하지만 어언 이태째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해 그야말로 전 세계가 전쟁 중입니다. 평소 청결을 유지하며 몸에 나쁜 음식이나 기호품을 멀리하며 건전한 생활을 영위한다지만 경제가 큰일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시는 분들께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중요한 건 여건이 어려울수록 창조주의 무한하신 긍휼을 전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추운 날씨에서 기승을 부린다는 코로나19의 확산이 인간의 잘못이나 부주의로 벌어진 재앙이기에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인체가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일교차나 갖가지 질병이 태초 에덴동산에서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죽음 자체가 아담과 하와의 자범죄로 말미암아 자자손손에게 유전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알려드린 비밀 가운데 첫째는 계절을 연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몸소 우주 만물을 지으신 터입니다. 그 모두는 우리 인간을 위한 대전제였죠.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이 땅의 기초를 놓으시고 하늘을 펴신 일을 성경은 백 차례 이상 증언하니까요. 저는 매번 기독교 신앙고백의 핵심이 바로 창조 사역에 숨어 있다고 역설하곤 합니다.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지구촌을 두고 우연에 의한 빅뱅(대폭발)이나 기원이 없는 진화론에 기댈 만큼 허무맹랑한 주장이 없으니까요. 가치 없는 가설마저 마치 사실인 양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야말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얼마나 우매해질 수 있느냐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창조가 믿어지면 성육신, 부활, 재림이 진실로 골수에 박힐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 언행 심사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영육 간에 강건함을 유지하기 위한 각자의 노력입니다. 차제에 술과 담배가 인체에 극도로 해로운 까닭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통념상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흡연의 폐해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사리 공감하는 데에 비해 음주의 해독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약 500여 년 전 해괴한 냄새로부터 시작된 담배는 인류의 기호품 중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약은 경중에 따라 각국이 눈을 부릅뜨고 단속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주류는 풀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이들이 해마다 늘어나는 겁니다. 주초(酒草)는 피로를 풀어주기는커녕 노화를 촉진합니다. 둘 다 뇌세포의 기능을 둔화하여 잠시 골치 아픈 일을 잊은 것처럼 느낄 뿐, 실제로는 기억력을 감퇴시켜 이해력을 떨어뜨린답니다.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지요. 술자리는 온갖 범죄의 온상이라는 뉴스를 자주 접하고 있잖아요. 셋째는 왜 인간이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원죄를 짊어지느냐입니다. 이른바 선악과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죠. 이 문제에 대해 정리한 바를 다시금 밝히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에덴동산에 심은 선악과는 저주가 아닌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나는 창조주요 너는 피조물이라고 일깨우신 보호장치였죠. 사람은 애초 영생하도록 만드신 존재였으니까요. 인간은 단지 시공에 제약을 받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인 겁니다. 그 뒤 아담은 930세를 살면서 민족을 낳으며 살았거든요. 게다가 그는 지혜의 원조였어요.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어줄 정도였습니다. 어떤 학자도 흉내 낼 수 없는 업적이었죠.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지상낙원에서 만물을 다스리다 보니 얼마든지 스스로 신으로 착각할 수 있어 최소한의 통제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 사랑의 율법이 바로 선악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뒤숭숭한 때일수록 성삼위 하나님을 향해 차분히 기도하십시오. 평정심을 유지한 채 우리나라와 한겨레를 뛰어넘어 세계인을 위해 간구하는 기독교인들이 늘어나야 합니다. 다각적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주신 영의 양식을 먹으며 아직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야 마땅하지요. 흔히들 기도 응답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고, 그 유형은 세 가지입니다. 즉, 자신이 믿는 전능자를 의심 없이 믿어야 하며, 공동체를 위해 꼭 필요하지만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을 욕심 없이 구하라는 게 그 전제조건입니다. 응답의 세 유형은 즉시, 보류, 부답(不答)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부합하면 곧장 들어주시고, 부합하지 않으면 무응답이요, 지금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는 사인을 알아차리는 몫은 본인에게 있다는 설명입니다. 하루빨리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믿음으로 돌아오시길 기도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6호)에는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 영혼 구원의 섭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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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1-12-30
  • [세상사는 이야기]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영혼 구원의 간구’ (2회)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창조주의 무한하신 권능을 체감하는 순간은 전심으로 기도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기도문을 가르쳐주신 이유입니다. 기도야말로 성도의 호흡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들숨과 날숨이 막히면 어떤 생명인들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주기도문에 담긴 신앙고백의 뜻을 되새겨보겠습니다. 곧바로 “하늘에 계신”이라고 수식한 것은 무소부재의 무한성을 뜻합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우주를 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불멸하시기에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두려울 만큼 지존하신 존엄성과 초월성을 지니셨으니까요. 우주를 창조, 운행, 섭리, 심판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일상은 곧 전지전능이십니다. “우리 아버지여”는 기도할 대상과 근원을 가리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지 않은 기도는 단순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독백이나 본능적 바람일 뿐입니다. 기도는 피조물인 천지신명이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단지가 아닌 성부, 성자, 성령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아니면 단지 사탄이 조종하는 잡신에 불과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름에는 인격과 성품이 깃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복음을 선포할 때도 나타나십니다. 주님이 거룩하시기에 성도의 삶은 늘 예배여야 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속히 오기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분부이십니다.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충만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나라’에 주격조사인 ‘가’ 대신 ‘이’를 붙인 것은 당대 언어 관습이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세상에 이뤄지기까지 순종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기에 감히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거나 편들기를 꾀하는 걸 엄금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으시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마냥 참지는 않으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그날 먹을 만나에 족하라는 말씀입니다. 불필요할 만큼 쌓아두는 탐욕을 경계하십니다. 누구나 불과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나는 참새마저 굶기지 않으시거늘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생명들에게 먹을거리를 주시지 않겠냐는 기도입니다. 양식을 가진 자들의 나눌 책무를 강조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참으로 무서운 질책입니다. 바로 나부터 남의 허물을 용서한 다음 주님께 용서를 구하라는 명령입니다. 죄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영벌로 떨어질 절체절명의 결과를 떠올린다면 당장 실행에 옮길 현안이지요. 남을 용서하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너나없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는 갈수록 악해지는 세상 속에서 갖가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는 뜻입니다. 기도에 게으를 때 마귀는 그 틈새를 노립니다. 신앙생활의 활력을 유지하는 비결이 기도인 까닭입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도구는 타락을 부추기는 문화입니다. 세상 정욕과 탐심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수시로 엎드려야 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앞의 내용을 요약한 구절입니다. 잠시 악한 것에 한눈을 팔거나 걸려 넘어졌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천국과 멀어지지 않겠다는 간구입니다. 성도는 지옥행을 예약한 마귀의 세력과 영적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무시로 기도에 매진할 때 사탄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고, 사악한 올무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영존하시는 하나님만을 드높여 찬양하는 송영입니다. “대개”는 ‘대략 일반적으로’라기보다는 ‘원칙적으로 말하건대’로 해석하는 게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오직 성삼위 하나님만이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을 높이는 일은 지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아멘”은 잘 아시다시피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히브리말로써 그 안에 확실성, 진정성, 충실성, 신뢰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멘’이라고 말하는 순간 앞에 기도한 내용을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시인입니다. ‘진실로’ 동의하고 확신한다는 보증입니다. 모쪼록 주위에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나눌 만한 이들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5호)에는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 영혼 구원의 사역’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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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3
  • [세상사는 이야기]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영혼 구원의 고백’ (1회)
    오늘따라 하늘이 유난히 높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군요. 역시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 만물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이번 편지에서는 “사도신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도신경(使徒信經)’ 또는 ‘사도신조’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앙고백입니다. 흔히들 12 사도가 만든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관계는 이렇습니다.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필두로(고로 사도신경을 ‘니케아 신경’으로 부르기도 함)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와 431년 에베소 회의를 거쳐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확정되었습니다. 그중 일부는 빼버렸고 여태껏 논란이 있는 구절도 있습니다. 어쨌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는 고백을 근거한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습니다. 가장 큰 성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을 공고히 한 부분입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신대원 시절 소논문, ‘사도신경의 의의와 실태 분석’을 들춰보았습니다. 사도신경은 성도들이 믿는 신앙의 실체를 구체화하였습니다. 먼저 성부, 성자, 성령에 관해 규정하면서 예수님을 6개 항목에 걸쳐 언급한 대목이 눈에 띕니다. 예수그리스도야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신의식을 분별해주는 핵심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출생, 고난, 돌아가심, 부활, 승천, 재림이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단 하나라도 믿지 않으면 결코 거듭난 신앙인이 아닙니다. 오늘날 언행일치와 거리가 먼 교회 지도자들과 명목상 출석자들로 인해 복음 전파 자체가 가로막혀 있는 현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믿음과 행함이 하나 되지 않으면 아직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으니까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복음은 늘 살아 움직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한 묵상이 절실한 때입니다. 사도신경의 내용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성부에 대한 고백은 구약, 성자에 대한 고백은 공관복음서, 성령에 대한 고백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교회와 성도에 대한 고백은 서신서, 영생에 대한 고백은 요한계시록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맨 처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는 창조주에 대한 고백으로 구약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신 전능자이십니다. 성도는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신을 믿고 나의 주인으로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전지전능하시기에 전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순전할 때라야 의미와 가치가 있으니까요. 어디 한군데 부족한 사람을 대하듯 슬그머니 한 자락 깔고 한번 믿어볼까 해서는 능력이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 점 의심 없이 믿고 욕심 없이 구하는 자에게 시와 때를 따라 응답이 주어집니다. 다음 예수님에 관한 항목이 펼쳐집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복음서에 나온 진술입니다. 글자 그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깨끗한 처녀인 마리아의 자궁을 사용하십니다. 원죄 없이 태어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낳으신 터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창조주께서 피조물이 되셨고,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참입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구름 타고 올라가신 예수님은 심판주로 재림하십니다. 이 말씀을 오롯이 믿는 자에게만 영생이 임할 것입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는 교회의 탄생과 발전을 기록한 사도행전에 해당합니다. 성삼위의 한 분인 성령님이 내주하시며 말할 수 없는 간구로 성도를 돕고 계십니다. 공회는 교회를 말합니다. 성도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신 말씀을 지켜야만 합니다. 다만 서로 교통하는 성도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가톨릭에서는 이를 죽은 성자와 복자로 봅니다만 단언컨대 일종의 미신에 속하는 사견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는 성도의 구원에 관한 것으로 신약의 21개 서신서 내용과 일치합니다. 마지막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을 예언한 요한계시록의 내용입니다. 부디 성도로서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써 천국 백성의 대열에 합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4호)에는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 영혼 구원의 간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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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1-12-16
  • [세상사는 이야기]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토론장을 달군 질문들 (하)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역시나 진지한 강의 내용을 은근히 데우는 역할은 번득이는 토론자들의 몫이다. 그 가운데 한 향토사학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유의미한 것들만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먼저 수도사의 창건 연대와 창건주에 대한 논의는 객관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전해오는 대로 신라 후기 가지산파의 1대 조사 도의의 제자였고 2대 조사였던 염거화상이 창건했다면 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본다. 또 수도사의 위치도 LNG기지 터에 있었다는 설이 있고, 18~19세기 괴태산 중턱에 존재했던 수도암이라는 설도 있는데 학술조사가 필요하다. 또한 원효가 견성오도한 장소까지 이르는 교통로를 체험관에 걸어 놨는데 과연 객관적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원효와 의상이 유학을 떠났던 시기가 661년이라고 판단하면 당시는 신라와 백제부흥운동 세력이 천안지역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었고, 영남대로도 조선시대와는 사뭇 달랐는데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조선시대 개념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다. 신라 때 육로교통로와 661년이라는 시대 상황을 고려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고승전을 비롯한 문헌에서 말하는 원효의 견성오도 설화에 대한 객관성을 좀 더 입증할 필요를 느낀다. 또 의상은 진골이고 원효는 6두품이므로 둘 사이의 신분적, 혈연적 관계는 전혀 없다고 본다.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 시기가 661년이라는 설이 정설처럼 전해지고 귀국한 것이 670년(문무왕 10)이라는 설도 정설처럼 전해진다. 그런데 2년만 머물렀다는 주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의상이 중국에서 ‘화엄일승법계도’를 작성한 시기가 670년으로 밝혀져 670년 당나라의 침입을 신라에 알리려고 귀국했다는 주장은 타당한 것 같다. 아울러 의상이 깨달음을 얻은 곳이 고구려였다는 주장의 근거도 궁금하다. 종남산이 중국에 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의상이 귀국한 670년은 고구려가 멸망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목장 안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대부분 목자(牧子)로 일했다. 하지만 맡은 역이 힘들어 신량역천으로 생각했다. 조선 후기 목장 안에서도 감목관들이나 백성들의 주도로 간척이 이뤄지고 이것이 목장전으로 수용되었는데 갑오개혁 이후 목장이 폐지된 뒤에도 백성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궁내부 경리원에서 둔전으로 판단하고 수용하면서 분쟁이 발생한 사례는 매우 많다. 괴태곶 목장도 그와 같은 사례로 판단한다. 본인도 오류를 범했지만 평택지역에서는 포승읍 만호리의 ‘대진’을 삼국시대 이후 대중국 교통로 및 교역로로 비정하는데 객관적 사실인지 모르겠다. 근래 가장 중요한 근거자료로 제시하는 1872년 지방도 수원도호부의 대진(大津) 관련 내용도 충청도 면천군의 대진(한진) 관련 내용의 오기로 판단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삼국시대 대진의 역할, 심지어 의상이 평택항을 통해 중국에 갔다는 주장은 근거가 미약해진다. 한국에는 220개의 봉수대가 있다. 1880년대 초 한국에 온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서울 목멱산봉수대를 봉화들의 집결지로 언급하고 있다.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전갈들을 서울에 알리기 위해 약 15분 정도 타오르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목멱산봉수대는 전국 방방곡곡에 뻗쳐 있는 봉화들의 집결지로서 소위 횃불 전신술의 마지막 지점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 안의 봉수대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봉수대가 산봉우리에 있는데 비해 화성봉돈은 평지에 축조되어 있다. 이름도 봉수가 아닌 봉돈이다. 이는 유사시에 봉홧불만 피우는 게 아니라 돈대 기능도 겸했기 때문이다. 돈대란 성벽에 구멍을 내어 대포를 쏠 수 있는 구조물이다. 그렇다면 평택에는 유일하게 괴태곶 봉수대가 있다. 여기에서 일어난 역사적 주요사건 기록이나 괴태곶 봉수대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봉수대는 근대 이전 외적의 침입을 불과 연기로 알리던 통신수단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 목멱산 경봉수를 중심으로 전국에 5개의 봉수로가 있었다. 평택에는 전남 여수 돌산도의 방답진에서 한양 경봉수까지 연결된 제5 봉수로의 직봉이 지나갔다. 그밖에 평택시민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 시내 매봉산 봉화대의 존재를 알린 데 이어 오늘 미군부대 봉수대 견학 계획이 무산된 데 대하여 유감을 표명했고, 인근 지역 국회의원이 몸소 찾아와 문화재 찾기운동에 힘을 보태는 미담이 있었다. 그는 잔뜩 고무된 지역사회 인사들에게 실질적인 방안으로 범시민운동단체를 결성하라고 권면하면서 화기애애한 모임은 막을 내렸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3호)에는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 영혼 구원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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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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