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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사는 이야기] 다양한 교회의 필요성 ‘소수인격을 보호하는 길’ (2회)
    우리 사회의 성소수자 상황에 대한 진단과 아울러 선교적 교회론의 관점에서 교회의 다문화 선교사역의 한 부분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실현 가능한 목회 패러다임 전환에 대하여 생각해보렵니다. 한국은 최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수용 여론이 급격히 우호적으로 바뀌는 나라 가운데 하나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른바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해 기독교계의 위기의식은 물론 군대 내 동성간 성행위 허용에 대한 우려까지 자아내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동성애자들이 급격한 사회변화를 주도해 나가려는 움직임에 대응하여 정교한 선교적 전략을 짜야 합니다. 이 현안은 동성애 반대를 성소수자 인권침해로 간주하는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과 맞물려 오늘날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해당 법조문에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차별’에 대한 명확한 개념과 함께 개인별 자유의 ‘역차별 금지 조항’을 반드시 명문화해야 합니다. 사안의 본질은 인종이나 성적지향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한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원칙에 있습니다. 즉 자신의 자유권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될뿐더러 피해자에 대한 구제조치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국민은 헌법에 명시한 대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호받되 법질서와 사회 시스템을 존중해야 할 의무를 동시에 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일부 몰지각한 행태를 통해 보듯이 무질서를 방치하는 것은 또 다른 혼란을 부추길 뿐입니다. 그에 따른 실현 가능한 목회 패러다임으로는 우리 사회에 소외되어 있는 성소수자들을 교회공동체에서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단, 그들을 최대한 이해하고 포용하면서 결국은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로마서 1:26-27)라는 복음을 깨닫는 순간 회개로 이어져 영육 간의 방황을 멈추게 된다는 진단입니다. 궤도를 벗어난 사람을 구하는 일만큼 소수인격을 보호하는 장치는 없다고 봅니다. ▲ 충북 진천과 맞닿아 있는 안성 배티성지 짚어볼 대목은 동성애자들이 스스로 동성간의 성관계로 노출하는 각종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도록 돕는 사역입니다. 축적된 통계에 의하면 게이들의 평균수명이 일반인보다 현저히 짧고, AIDS 감염률은 면역력 약화로 100배 이상, 청소년 자살률은 4배 이상, 암 발병률은 2배에 달함에도 항문(배변 기능을 상실하는 변실금 유발)이나 혓바닥(세균 감염으로 치주염에 시달림)을 성행위에 사용하는 일은 의학적 무지에 기인하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지속적이고 진정성 있는 정체성 및 성교육과 함께 동성애 법제화의 현실을 각자의 가정사에 대입하면 대답은 훨씬 자명해집니다. 집안 며느리로 남자가 들어오고, 누이의 배필(매형이나 매부)이 막상 여자라면 누군들 찬성할 수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여성 속의 남성성(anima)과 남성 속의 여성성(animus)은 상존하는 법이므로 인체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의 근원을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동성애 대책 중 시급한 것은 교회들이 한목소리를 내는 일입니다.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공청회도 필요할 것입니다. 판넨베르크(Pannenberg)의 말처럼 교회공동체 내에서 동성애를 승인하고 동성결혼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동성애자 역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므로 그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보듬고 치유해야 합니다. 동성애자는 혐오할 상대가 아니라 구원의 대상인 것입니다. 엄연히 다른 뜻의 차별(discrimination)과 차이(difference)를 구분하여 선교전략을 수립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제 동성애는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issue)를 넘어서 바로 코앞에 닥친 일상사의 국면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파고를 성경에 입각해 지혜롭게 극복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은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가치가 아니라는 지점입니다. 동성애는 적당히 타협할 문제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며 지속적으로 풀어야 할 모두의 관심사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49호)에는 ‘다양한 교회의 필요성 - 중국선교를 위한 대안책’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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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9-23
  • [세상사는 이야기] 다양한 교회의 필요성 ‘급변하는 다문화 상황론’ (1회)
    눈앞에 펼쳐진 다문화 상황에 대한 확실한 진단과 더불어 사랑받는 교회론의 관점에서 실현 가능한 목회 패러다임 전환에 대하여 생각해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회가 맞닥뜨린 대내외적 다문화 상황은 지구촌에 도래한 기후변화만큼이나 급진적입니다. 온난화의 속도를 생태계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밀려드는 다양한 인종을 발 빠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양상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어떻게 대처해야 하고 효과적인 전도 전략을 짜야 할까요? 이는 세계 각국에 적극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문제와 맞물려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해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 이어령 박사가 조합한 이른바 글로컬리즘(glocalism)은 보편성(globalism)과 특수성(localism)을 합성하고 있다는 면에서 ‘선교적 교회론’을 재정립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신현수 교수의 말처럼 “선교적 교회란 단순히 ‘지역교회가 선교를 하지 않고 있다’거나 혹은 ‘선교사역의 비중이 작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인 구조가 ‘선교지향적’ 혹은 ‘선교중심적’으로서의 교회를 추구”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계화와 더불어 지역화의 과제가 무겁다는 반증입니다. 그에 따라 실현 가능한 목회 패러다임으로는 먼저 우리 사회에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단일민족이라는 잘못된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른바 ‘뷔페 이론’(salad bowl model)에 의해 여러 민족이 형성하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선교학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문화다원주의는 종교다원주의와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라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동일선상에서 그 창조적 가치와 의미를 존중해야 합니다. 마땅히 천부적 인권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하자는 취지입니다. ▲ 충북 진천과 맞닿아 있는 안성 배티성지 노영상 교수는 ‘문화상호교류주의 이론’(inter-culturalism model)을 내세워 다양성 속의 일치를 견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2006년 5월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발표한 ‘문화 민주적 통합으로 한국을 문화용해의 장’(cultural melting pot)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의 다문화가정 교육지원 대책은 자칫 ‘한국 기독교인 만들기’ 또는 ‘한국 기독교 선교사 만들기’의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으므로 각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필자 역시 당국의 근시안적인 정책에는 오히려 다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만한 소지가 다분하다고 진단합니다. 다만 다문화주의의 공존을 가장한 기독교 선교의 전방위적 방해 활동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 구원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종교나 교리는 사탄의 교묘한 문화적 침투전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늘 표피적으로 제기되는 종교 편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목회현장에서 부딪히는 다문화가족들을 위한 개교회의 구체적인 목회사역 매뉴얼(지침)의 개발이 시급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선도적 교회들이 나서서 후발 주자를 이끄는 리더십이 절실한 부분입니다. 헌신을 전제한 본보기가 관건입니다. 사안을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복음과 문화 네트워크”에서 이해하는 선교적 교회는, 첫째 교차문화 상황에 존재하며, 둘째 그것의 상황과 함께 대화 속으로 들어가서, 셋째 그 구성원들에게 성경적 관점으로부터 문화를 생각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넷째 그 자체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고 변화를 추구하면서, 다섯째 그 자신이 발견한 주변부로의 위치를 받아들인 뒤, 여섯째 그 자신이 속한 상황과 문화 안에서 증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선교의 본질적 성격상 접근이 쉽지는 않습니다. 구더(Darrell L. Guder)가 정리한 ‘선교적 교회론’은 적잖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는 교회에 관한 것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해야 하고, 역사적으로는 우리의 교회론이 다른 교회론들의 역사적 발전을 고려해야 하며, 상황적으로는 복음은 항상 한 문화 안에서 번역되고 영적으로 위임된 것에 대한 문화의 반응에 의해 형성되어 나감으로써, 종말론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만물의 완성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음을 믿기에, 실행적 측면에서의 그것은 실천으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48호)에는 ‘다양한 교회의 필요성 - 소수인격을 보호하는 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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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9-15
  • [세상사는 이야기] 청령포의 오래전 풍경화 ‘처연한 단종의 인물화’ (후)
    거기서 왼쪽으로 가파른 언덕배기에 올라 서면 ‘노산대’에 이른다. 1457년 6월, 겨우 열두 살 소년이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여 만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채 날마다 해질 무렵이면 힘겹게 기어올라 하염없이 한양을 바라봤다는 지점. 그가 정순왕후 송씨를 그리워하며 돌을 하나씩 둘씩 주워 모아 쌓았다는 망향탑을 대하노라니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는 느낌이다. 슬프게도 청령포로 유배된 지 고작 4개월 만인 1457년 10월 24일, 단종은 무자비한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고 관풍헌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다. 그의 억울함은 그로부터 무려 200여 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에야 풀어져 대군에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년)에 가서야 다시금 임금으로 복위되어 그 묘호(廟號)를 단종이라 부르게 하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 척살을 당한 원혼들을 달래줄 방도가 마땅히 없다는 푸념에는 응답할 얘깃거리조차 없다. 어쨌거나 아름다운 청령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굽이치는 강물이 휘감아 도는 정경을 지척에 두고서 감상할 수 있다는 연유로 인해 이처럼 명승지로 변모한 걸 보면 무심한 세월에 격세지감마저 든다. 무엇보다 길손이 지닌 처연한 감성을 자극하는 곳은 그의 무덤이었다. 사적 제196호로 지정된 '장릉(莊陵)'이 그곳. 하기야 오랜 세월 구슬픈 사연을 애써 감내하는 데가 어찌 이뿐이랴마는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쫓겨나 짧은 일생을 지레 마감할 줄을 어찌 알았으랴. 당시 의금부 도사였던 왕방연은 비운의 왕을 이곳에 가두고 떠나기 하루 전 이렇게나마 가엾은 고혼(孤魂)을 달래주었다. 직책상 부득불 조정에서 명령한 업무를 수행하던 한 관리의 비통한 심정이 ‘단장가’라는 한 편의 시조로 남겨져 나루터에 떠돌고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하지만 불의를 보고서 항거를 마다치 않은 절개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장렬히 죽음을 맞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을 묶어 우리 후손은 '사육신(死六臣)'이라 칭송하고, 비록 죽음을 불사하지는 아니했으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한 나머지 한평생을 죄인이라 자처하며 살다간 김시습 등의 여섯 명을 두고는 '생육신(生六臣)'으로 부르고 있다. 그게 비록 아니어도 이른바 ‘배일치(拜日峙) 고개’에 이르면 가슴이 아려오는 구구절절한 사연에 젖어 누구라도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 암울한 시절 단종이 유배지에 가까이 오면서 앞날을 기원하기 위해 해를 보고 절을 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래서 더욱 처량한 청령포는 오늘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 속에 서슬 퍼런 역사를 떠내려 보내고 있다. ▲ 강원도 영월에 소재한 청령포 해 질 녘 우리의 발걸음은 또 다른 팻말을 향해 바삐 움직였다. 남녘으로 얼마큼 달려가니 특이한 종유석으로 유명한 ‘고씨동굴’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이 근처에 살던 고씨 일가가 숨어들어 난을 피했다는 은신처. 이곳 역시 늘어뜨린 밧줄을 부여안고 내를 건너 좁디좁은 굴속을 비집고 들어가니 지하에서 솟구치는 시원한 물줄기가 일품이었다. 몸집이 큰 아줌마 때문에 간신히 빠져나오는 길에 사방을 두루 살피니 래프팅하기에 최적인 동강(東江)의 물줄기. 해마다 뗏목 축제를 개최하여 그 옛날 운송수단의 정취를 맛보는 곳에 무시무시한 인공 댐을 건설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적잖은 기간 환경 지킴이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기억이 생생하다. 모름지기 한번 파괴된 자연이란 복원이 거의 불가능해지거늘 어찌하여 심각한 고민의 흔적도 없이 그토록 쉽사리 어리석은 시도를 거듭하는지 실로 안타까울 뿐이다. 예로부터 인적이 드문 오지였기에 불과 얼마 전까지는 동해안을 찾는 경유지 정도로 여겨온 영월 지방. 하루 온종일 맑은 대기를 들이마시며 푸르디푸른 솔잎 속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깨끗한 냇물에 발을 담그고는 며칠 전 무거운 벼슬을 내려놓은 선비인 양 한껏 유유자적을 맛보고 싶었다면 나만의 과욕일까? 시나브로 꽉 막힌 가슴이 탁 트이는 청량한 고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잘 보존된 산하가 아직 우리 곁에 오롯이 남아 있기에 크나큰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장경(場景)을 만끽한 뒤 무사히 집에 돌아온 우리 식구들 표정은 한층 밝아져 있었다. 그렇다면 오호라 경사로다, 비록 식전부터 뜻한 바는 아니었을지언정 홀가분하게 다녀온 당일치기 여행이라는 데 자족하리라.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47호)에는 ‘다양한 교회의 필요성 - 급변하는 다문화 상황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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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9-01
  • [세상사는 이야기] 청령포의 오래전 풍경화 ‘청량한 포구의 산수화’ (전)
    한 학기를 알차게 마무리한 보람의 맛은 언제나 기분 좋은 자유의 시공이다. 평소에 비해 늦은 아침을 들고 그리하리라 작정한 바도 없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그러나 오랜만에 바람이나 쏘이자며 자동차 페달을 살짝 밟는다는 것이 그만 장호원을 지나고 음성을 거쳐 어느덧 충주에 들어서면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풍치에 금세 물들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냉큼 돌아서기 싫은 국면. 그렇다면 일단 이 순간을 즐기리라. 우리 네 식구는 하나같이 사방에 펼쳐진 황홀경에 흠뻑 빠져보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렇더라도 왠지 어정쩡한 느낌이어서 단양팔경 중 어느 한두 곳만 구경한 다음 나중에 다시 올까, 아니면 내친김에 숙소를 잡고 청려(淸麗)하기 이를 데 없는 나머지 절경까지 죄다 돌아볼 건가를 제각기 재어보았다. 원래 의도는 분명 둘 다가 아니로되 주변의 청아한 풍경이 네 명의 나그네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점심때가 가까워지니 장기 전체에 출출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직 장호원은 못 미쳤으나 바로 곁에 단아한 초가가 있어 그 옆 솔숲 자락에 자리를 깔았다. 그런데 주섬주섬 챙겨온 과일에 문제가 생겼다. 트렁크에 넣어둔 수박에 얼이 잔뜩 먹는 바람에 맛이 좀 이상했다. 통째로 버리기는 아까워 성한 부분을 골라 먹는데 딱 한 입 베어 물기가 무섭게 아주 정색하는 인사가 있었으니 어린 아들내미였다. 그 모양새가 하도 우스워 다들 배꼽을 잡는 가운데 드는 생각인즉 오늘은 김밥 도시락이나 얼른 까먹고 가벼이 드라이브나 즐기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맘이 언뜻 들다가도, 까짓것 이왕지사 일이 이쯤 되었다면 내친김에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느낌이 오락가락했다. 어렵사리 내린 결정은 아쉽지만 가장 유명한 청령포만 재빨리 둘러보고 집에 돌아가자는 쪽이었다. 부랴부랴 영월로 향하는 길. 목하 차창 밖은 수려한 강산의 연속극이다. 상상한 이상 고운 풍치에 너나없이 매료된 듯 차 안은 연신 감탄사들로 가득하다. 어느새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예약해둔 채 남쪽으로 흐르는 내[川, 시내와 강의 중간 크기]가 넓다고 하여 붙여진 듯 광천리(廣川里)라는 팻말이 보였다. 그 청량하기 그지없는 청령포(淸玲浦)에 다다랐음을 알아차린 건 첫눈에 비친 비경(祕境) 때문이었다. 읍내로부터 십 리 좀 못 미친 지점의 좁다란 강가에는 막바지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 몇몇이 띄엄띄엄 한가로운 강촌을 시름없이 거닐고 있었다. 자료를 들춰보니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하여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룬 곳으로써 동·북·서쪽이 모두 깊은 물줄기로 막혔을뿐더러 육지로 이어지는 남쪽마저 육륙봉의 험준한 층암절벽이 솟아있었다. 이를테면 단종의 유배지로 낙점할 만한 섬 아닌 섬이었다. ▲ 강원도 영월에 소재한 청령포 아닌 게 아니라 영화 빠삐용의 요새처럼 탈출이 불가능한 절해고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항간에 널리 육지 속의 고도(孤島)로 알려진 대로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인 데다가 남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어 고스란히 감옥을 삼기에 손색이 없다는 게 중평이로되, 속절없이 세월만 흐르다 보니 솔숲이 울창하고 강물은 더없이 맑아 영월 팔경 중 으뜸으로 꼽는 명소에 걸맞게 피서객과 낚시꾼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따라서 거기에 가려면 반드시 배를 타야 한다. 재밌게도 강철 밧줄을 손으로 잡아당기며 강폭을 가로질러 건너편에 맞닿는 수단이 색다른 정취와 감흥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조심스레 뭍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널따란 잔돌밭이 가족 단위의 일행을 맞았다. 청령포는 한낮인 데도 해가 진 듯 어두웠다. 그러고 보니 햇살이 뚫지 못할 만치 울창한 수목들로 빼곡하다. 하늘을 뒤덮은 나무 가운데 맨 먼저 눈에 띈 건 관음송(觀音松). 단종의 유배 생활을 줄곧 지켜보았을 거라며 ‘볼 관(觀)’ 자에 피맺힌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뜻으로 ‘소리 음(音)’ 자를 따서 붙였단다. 입간판을 보니 둘레가 5m가 넘는 높이 30m가량의 600년생 소나무는 빼어난 자태로 인하여 1988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적송이었다. 그 우측으로는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자 일반인의 출입을 엄금했던 금표비(禁標碑)가 있었는데 한때 화마에 휩싸여 영조 2년에 복원했단다. 돌비에 쓰인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 차후니생역재당금(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인즉, 사방으로 접근이 엄격히 금지된 구역이었음을 소개한 내용이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46호)에는 ‘청령포의 오래전 풍경화 - 처연한 단종의 인물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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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8-25
  • [세상사는 이야기] DMZ 일원 안보현장 탐방기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유엔군’ (후)
    삼삼오오 우산을 접은 채 당도한 ‘유엔군 화장장’은 자못 쓸쓸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분들의 희생이 뒤따랐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해방 후 전 세계를 통틀어 원조를 받던 형편에서 남을 돕는 선진국으로 일약 발돋움한 터다. 한국전쟁에 관련한 자료를 뒤적이니 공식적으로 미군 36,940명을 비롯한 전사자만 4만 명이 넘었고, 부상자도 10만 명 이상, 실종자가 4,116명에 달했다. 한국군은 1,269,349명 참전에 전사 158,365명, 부상 458,174명, 실종 27,235명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정의는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이다. 그때 남북한 총인구는 3천여만 명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분단과 전란으로 인한 천만 이산가족의 뼈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발길을 감악산(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기슭에 자리한 ‘영국군설마리전투추모공원’으로 돌렸다. 우뚝 평화의 문이 웅변하듯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1개 대대 병력을 잃은 험지. 올해로 즉위 70주년을 맞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1999년 자신의 73회 생일을 기해 다녀갔다더니 베레모 조각품 뒤로 이역만리에서 산화한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며 영국군의 사진과 이름들을 빼곡히 기록해 놓았다. 여러 폭의 동양화 병풍처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계곡 너머 말끔히 단장한 글로스터 다리를 건너 근엄한 칸 중령 십자가 기념비를 살펴보는 동안 새삼 이 땅을 죽음으로 사수한 영혼들을 가슴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누구인들 단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 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정의를 거스른 채 침략한 적군을 무찌르기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숭고한 희생에 삼가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 경기도 연천군에 소재한 고랑포구역사공원 원래 예정한 ‘태풍전망대’가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 막히는 바람에 대신 들른 ‘오두산통일전망대’. 하지만 통유리창에 잔뜩 희뿌연 물안개가 서려 있어 800m 떨어진 북한인들의 주거지는커녕 바로 앞 10m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시초부터 줄곧 전망대를 지킨 중년 해설자로부터 개관에 얽힌 사연을 듣고 영상을 통해 확인한 북녘의 주요 도시 시가지는 오히려 그림이어서 더 흥미를 끌었다. 이를테면 대중매체를 통해 이미 그네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마당에 적나라한 실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았자 공연히 속내만 불편해질 수 있다는 일말의 노파심이랄까. 아무튼 정치적으로는 비록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있되 민간 분야에서만큼은 여타 여건에 상관없이 힘껏 도움을 주고 싶어도 한사코 거부를 일삼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맑은 날이면 멀리 개풍지역까지 바라다볼 수 있다는 4층 전망 라운지는 때마침 출입금지여서 빗물로 얼룩진 야외 전망대로 이어진 연결 다리만 물끄러미 쳐다보며 2층으로 내려와야 했다. 그리운 내 고향 코너에는 실향민들이 정성껏 만든 설치미술 작품이 애타게 손님을 기다렸다. 볼거리가 널린 곳은 1층 상설전시실. 연도별 남북관계사를 필두로 한반도 정책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 자료들이 길손을 맞았으나 전자방명록이 있는 염원실이나 통일열차가 내달리는 포토존보다는 역대 대통령의 통일 휘호에 더 관심들이 쏠렸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웃음이 한꺼번에 터진 건 모 대통령의 사인 때문이었다. 필자의 경우 무기의 잔해로 제작한 피아노와 촘촘히 꾸민 기획전시실을 눈여겨본 다음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자유로에서 고 조만식 선생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선 발걸음이 왜 이토록 무거울까? 그건 필시 한반도 비핵화 협상이 꽉 막혀버린 데 따른 남북관계의 늘어진 파장이리라. 해거름이 드리울 무렵 평택-제천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잠시 들른 신개념 평택휴게소는 원형 디자인이 돋보이는 세련된 건축물이었다. 첫눈에 준공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는데 조경도 훌륭하고 동선의 움직임도 꽤 원활한 편. 그러나 불티나게 팔리는 먹거리도 좋고 볼만한 구경거리도 꼭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비책은 이 모두를 엮는 스토리텔링에 있고, 짙푸른 DMZ처럼 살아있는 생태계 보전이 으뜸이렷다. 막바지 세찬 장대비를 뚫고 무사히 마친 하룻길. 게다가 맛깔스러운 콩떡이며 과자류에 더해 마실 물과 물티슈도 모자라 고소한 들기름까지 선물로 받은 오늘 여정이야말로 이번 행사를 애써 준비한 평택콜로키움의 이장현 회장과 금요포럼 임원진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면을 빌려 다시 한번 감사와 존경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45호)에는 ‘청령포의 오래전 풍경화 - 청량한 포구의 산수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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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8-18
  • [세상사는 이야기] DMZ 일원 안보현장 탐방기 ‘경순왕릉과 레클리스의 대비’ (전)
    이순을 훌쩍 넘긴 부부가 마치 소풍을 기다린 애처럼 밤새 전전반측을 거듭한 까닭은 비단 심술궂은(그러나 해갈이라는 측면에서는 무척 고마운) 비바람 탓만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이태만의 나들이였거니와 그간 몹시 궁금하던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 일대를 둘러볼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락가락하던 빗줄기가 소강상태를 보이는 가운데 일행을 태운 버스는 어느덧 한강변을 지나며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차창에 비친 목동 아파트 대단위단지는 강남 못지않게 집값 폭등을 주도한 곳. 코앞에 두고 감상하는 골동품도 아니건만 왜 이리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은 물론 젊은이들의 의욕마저 꺾어버려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하루빨리 상생의 원리를 깨달으면 좋으련만. 다소 칙칙한 듯한 기류를 뒤바꾼 이는 진행을 맡은 장승재 DMZ관광(주) 대표. 그의 입담은 초장부터 예상치를 크게 웃돌았다. 오랜 기간 디엠지 안보관광을 개척해온 선구자답게 군사지리 전반의 해박한 지식과 구수한 해학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일일이 소화하기도 벅찰 만치 풀어놓은 보따리 중 충격적인 건 연천군의 재정자립도가 18.59%(참고로 평택은 42%)에 지나지 않는다는 한탄. 접경지대라는 제한점은 있으나 리더십의 부재가 낳은 결과라며 맹성을 촉구하는 어투였다. 그러고 보니 한탄강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이의 호를 딴 율곡리조차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재밌게도 즐비하게 늘어선 무인텔 가운데 율곡모텔이란 간판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랑스런 동방예의지국에서 발달한 성인지감수성인지, 최소한의 상도의인지는 잘 몰라도 슬쩍 미소가 지어지는 지점이었다. 첫 방문지는 신라 마지막 56대 ‘경순왕릉’. 고랑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에 단독으로 위치했다는 팸플릿을 보며 흡인력 있는 해설사의 말을 귀담아들으니, 고뇌에 찬 군신회의를 거쳐 마침내 누대를 이어온 종묘사직을 고려국에 평화적으로 이양한 왕조정치의 치적을 한껏 기리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항복 이후 43년을 보탠 93세를 일기로 천수를 누렸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필자의 뇌리에는 이에 반발해 금강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생을 마친 마의태자가 떠올랐다. 무고한 백성들을 사지로 내몰아 더는 죽일 수 없다는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일국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어야 한다며 끝까지 반대를 무릅썼던 그의 울음소리는 소설가 정비석이 쓴 “山情無限(산정무한)”이라는 기행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사이 누꿈한 날씨는 포근한 안개와 이슬비의 중간쯤 되는 ‘는개’로 변해 있었다. ▲ 연천 고랑포구역사공원 서둘러 도착한 ‘레클리스 동상’ 앞. 입간판을 보니 분명히 한 마리의 동물에 지나지 않거늘 미군에 공식적으로 등재한 군마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1952년 미합중국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이듬해 연천에서 벌어진 중공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하루에 4~5톤 무게의 탄약상자와 부상병들을 50여 차례나 실어 날랐다는 설명은 좌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Reckless’라는 호칭으로 훈장을 5개나 받는 등 1959년 미국 최초의 말 하사관으로 진급했으며, 세 마리의 새끼(피어리스, 돈틀리스, 체스터)를 생산한 뒤 1968.5.13.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죽음을 맞이했단다. 여기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역사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누란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도운 나라가 놀랍게도 전투지원 16개국과 의료지원 6개국 외에도 물자지원국이 40개 나라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현지에서 기른 콩으로 빚은 두부 전골을 맛있게 들자마자 조심스럽게 다가간 ‘호로고루성’은 남한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구려의 방어성벽. 삼각형 모양의 강안 평지성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고랑포 여울목은 본시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노출된 석벽을 끼고 돌아 돌계단을 밟고 꼭대기에 올라서니 과연 사방이 탁 트였다. 눈길은 나루터 밑을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호로고루는 임진강의 옛 명칭인 호로하(瓠瀘河)에 있는 오래된 보루라는 뜻으로 평소에는 실개천에 불과하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강물로 넘쳐났다. 그렇게 활발한 물자교류에 힘입어 이 근처에 화신백화점 분점을 세웠다면 당대 삼십여만 명이나 모여 살며 연일 북적댔다는 계산이 나올 법하다. 해마다 통일바라기공원에 만개한 해바라기들이 방문객을 맞이하는 오월이면 석양에 물들어가는 붉은 노을이 어느 명승지보다 가히 환상적이란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44호)에는 ‘DMZ 일원 안보현장 탐방기 -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유엔군’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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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8-11
  • [세상사는 이야기]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영원의 피안을 갈망하다’ (5회)
    이제 우리는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다가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를 궁리해야 합니다. 다소 무겁지만 태초에 태어난 아담과 하와는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생령이 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어쩌면 그것이 에덴동산의 완벽한 축복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연유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공중 권세를 잡은 악령들이 발호하고 있었다는 서술입니다. 이를테면 땅이 혼돈하다는 진술은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세력의 실체를 만천하에 공포한 현장이었습니다. 그다음 구절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어진 말씀처럼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고 있었으니까요. 음미하면 할수록 참으로 달고 오묘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재야 신학자 한 분은 이를 놀랍게 풀이했습니다. 무척 조심스럽긴 하지만 아주 조금만 밝히자면 바로 그것이 좀처럼 끊이지 않고 죄악을 되풀이하는 인간의 속성과 결부되어 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그분의 영성을 충분히 신뢰하는 입장에서는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다고 감히 사려하는 바입니다. 해맑은 하늘과 검붉은 진토(塵土)야말로 절대 뒤섞일 수 없다는 선언으로 마음속에 고이 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우리는 현재 주신 것만으로도 자족할 줄 아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비록 타락한 땅 위에 두 발을 디디고 살지언정 결단코 불의한 세파에 휩쓸려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입니다. 남들이 한다고 무심코 따라 하다가는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데서 끝나지 않거니와 그 몇 배로 책임을 떠안을 수 있으니까요. 선물로 주신 자유의지를 마음껏 사용하고 사는 만큼 그에 상응한 책무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피조세계는 일순간에 커다란 불협화음을 내며 엄청난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랍니다. 사전에 마땅히 예방할 의무도 있겠습니다만 일단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슬기롭게 수습할 책무를 져야 하니까요. 평소 최선의 대안을 고민하는 자세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고 절차에 따라 문제를 제기하되 비판하고 분석하는 것 이상으로 복안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조언입니다. 그에 대한 화룡점정은 무엇입니까? 신행일치를 통한 솔선수범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아니고서는 설득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 평택섶길 상공에 떠 있는 동력 패러글라이딩 다만 생명을 살리는 복음과 배치되지 않으면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평화하되 그와 동시에 구별된 삶을 고수하는지를 불신자들은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소망은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는 일입니다.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습니다. 자질구레한 걸 가지고 쓸데없이 다투지 말라는 진언입니다. 의외로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이들을 자주 목격하기에 드리는 고언(苦言)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작지만 큰일이 있을 수는 있으나 대체로 큰 뜻을 품고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대목입니다. 무릇 서로의 감정이 상하면 자칫 본질을 흐리기 십상이어서 되짚어보자는 뜻입니다. 과거사를 훑어보면 이런저런 이해타산이 문제의 진원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과감한 양보를 통해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라는 권면입니다. 시일이 지나고 보면 그것은 결코 피해가 아닌 이득이 되어 돌아옵니다. 이것이 삼위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끝까지 돌보시는 원리입니다. 그런데도 “왜 인간 최초의 부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거짓말을 더 신뢰하였을까요?”, “도대체 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동행을 원하셨던 하나님의 축복을 그리도 쉽사리 걷어차 버렸을까요?”, “왜 인간들은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위임하신 자유의지를 악용하며 제멋대로 살아갈까요?”, “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는 믿는다고 시인하면서도 여전히 그에 부합한 행실들은 따라주지 못할까요?”, “왜 인간들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죄악의 문제에 관하여 이토록 무심할까요?”, “왜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은 종말론적 상황을 맞고도 깊게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신의 존재마저 부인하는 것일까요?” 이상의 질문들을 한마디로 줄이면 강퍅한 인간들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도록 도울 수 있느냐로 모을 수 있겠습니다. 지금도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43호)에는 ‘DMZ 일원 안보현장 탐방기 - 경순왕릉과 레클리스의 대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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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8-01
  • [세상사는 이야기]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인간의 내면을 주시하다’ (4회)
    에덴의 실상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애석하게도 하나님께서 금하신 단 하나의 열매에 손을 대고 말았던 겁니다. 암기력이 약한 저로서는 제일 부러운 대목이 아담에게 여태껏 동식물도감을 펴낸 어느 학자보다 뛰어난 지식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각종 들짐승과 새들뿐만 아니라 식물의 이름을 단번에 지어줄 만큼 영특했으니까요. 그 뛰어난 지혜를 부어주신 분께 무한 감사하기는커녕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던 최고의 찬사마저 까맣게 잊은 채 가당치 않은 핑계를 대며 자신의 죄를 냉큼 인정하지 않았고, 재빨리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로 숨어들었던 겁니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또 있을까요? 멍청한 인류의 조상으로 인해 다들 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과격한 표현을 썼지만 우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게 솔직한 고백입니다. 우리 안에도 스스로 신이 되고 싶은 우상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극지점은 죽어서도 계속 숭배받고자 하는 영적 탐심으로 나타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이 풍진 세상에도 가녀린 소망은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똑같은 은혜를 베풀고 계시거든요. 그 힌트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비록 불순종으로 인해 저주받은 땅에서 고통을 감내한 채 살아가지만 죽은 다음에는 부활한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잖아요. 그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에덴동산 한가운데 나란히 심은 이유였거든요. 이제 영생이냐 영벌이냐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택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린 셈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자유의지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축복이냐고요? 따지고 보면 엄연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되는 권한을 허용하신 거잖아요. 순전히 본인의 결단으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거든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으니까요. 부디 한 영혼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설령 온 세상을 얻는다 한들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생의 절대성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평택섶길 주목할 지점은 신구약 성경에서 숨김없이 다루고 있는 주요 인물들의 별의별 죄악상이랍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교리를 표현한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사뭇 다르거든요. 예컨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말씀에서 그 인간상들을 두루 만나볼 수 있습니다. 굵직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훑어보면, 술에 취해 하체를 드러낸 노아로부터 사람을 죽인 모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거짓말, 사사로서 교만과 음란에 빠진 삼손, 기름 부은 왕이었으나 배교한 사울, 간통과 살인교사죄를 범한 다윗,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스데반의 순교에 가담한 바울,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헤롯, 세 번 그리스도를 부인한 베드로,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에 이어 극형을 지시한 본디오 빌라도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버거울 정도니까요.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우리 죄인들에게 소망이 있다는 겁니다. 다만, 그러므로 적당히 죄를 지으며 살아도 된다는 면벌부는 아닙니다. 그만치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 자체를 경계하라는 뜻이니까요. 그렇다면 과거를 거울삼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내일을 대비해야 할까요? 에덴동산의 뼈아픈 실패담에서 그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아담과 하와를 또 소환하면 늘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물론 국내외적 상황이 이른바 3고(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에 시달리는 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아무리 세상살이가 험난할지라도 한시도 영적 무장을 늦출 는 없는 거죠. 날마다 근신하지 않으면 우리를 대적하는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니까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에 방점을 찍으라는 외침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주어진 조건에 감사를 모른 채 살다가는 언제든지 사탄의 유혹에 속수무책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평소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당연히 그에 합당한 삶으로 증명해야지요. 최초의 부부가 잊고 살았던 복음을 오늘날 우리 가정에서 실천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삶의 초점을 무한한 창조세계를 향한 신앙의 순수성에 맞춰야 하는 터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42호)에는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 영원의 피안을 갈망하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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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7-21
  • [세상사는 이야기]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지상의 본분을 망각하다’ (3회)
    알고 보면 사람들은 정녕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앞뒤 안 가리고 더 많이 소유하고자 몰두하다가 영원히 죽는 줄도 모르는 형국이지요. 성도 여러분,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다가 기한이 차서 죽음으로써 모든 게 끝난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짧게 살다 죽으나 길게 살다 죽으나 도대체 무슨 차이가 나느냐는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 교인들은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맘대로 놀지도 즐기지도 못하다가 그냥 사라지는 거 아닙니까? 한마디로 내세를 전제하지 않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정의를 동원해 남을 감쪽같이 속여도 되고 법적 테두리에서 의도한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논리가 성립하잖아요? 그런데 왜 사람들이 종교 시설에 모여들까요? 나름대로 기부나 봉사도 하면서 공덕을 쌓기 위해 애쓰는가에 관한 답이 나온 셈이죠. 막연하게나마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저마다 이생이 전부라는 확신이 확고하다면 굳이 자신의 행동을 선행의 틀 안에 담보하려고 그토록 몸부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성경이 제시하는 은혜의 샘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성삼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희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에덴에서 쫓겨나는 처지였지만 살뜰히도 챙기셨습니다. 자, 보십시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도 모자라 지나가다가 혹시라도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죄를 지은 상태로 영생할까 봐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그 길목을 지키게 하셨잖아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피조물을 돌보시는 마음입니다. 오죽하면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시면서도 노아 식구들로 하여금 후일을 도모하셨겠습니까? 손수 지으신 사람에 대해 한탄하셨음에도 말입니다. 심지어는 더 이상 구원받을 만한 영혼이 없을 때 창조주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생각할수록 인간의 유한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증유의 대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법칙을 만드신 분이 스스로 피조물이 되심으로서 그 원리를 몸소 증명해주신 대역사였습니다. ▲ 평택시 대추리길에 열린 으름열매 다시금 말씀으로 돌아가 태초의 에덴동산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살기에 쾌적한 날씨였겠습니까? 아예 옷도 걸치지 않은 채 살았잖아요. 사람이 일교차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가 인체를 겉늙게 만든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터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게 되었나요?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불렀을 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다고 대답하잖아요. 죄를 짓고 나서 자신들이 벌거벗은 걸 알았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먹을 게 지천이었잖아요. 땀 흘려 일하지 않아도 입맛에 따라 끼니를 즐겼다는 얘기거든요.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혜택은 아담과 하와는 힘들게 배우는 과정 하나 없이 어마무시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태어나자마자 성인이었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만치 언어 실력을 충분히 갖춘 상태였잖아요. 그렇다면 뭐가 더 필요한 거죠? 도대체 무엇이 모자라 단 한 가지 규정을 지키지 못하고 이 모양 이 꼴을 만들었는지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렇게 복잡미묘한 문제에 관해서는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할 참입니다.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차분히 한 가지씩 짚어봅시다. 아담은 삼위의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관리하고 동식물을 통치하라는 중대한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어진 자리에서 에덴동산을 다스린 건, 각 생물의 이름을 지어준 게 전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기도나 찬양을 드렸다는 장면도 없습니다. 아내와 함께 가정예배를 드린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담은 창조주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단 한 가지 정해놓은 규칙이 금단의 열매였습니다. 선악과의 의미는 “나는 창조주요 너는 피조물임을 절대 잊지 말라.”고 하신 일종의 ‘신분 자각 장치’였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조건이야말로 얼마든지 아담 자신이 창조주인 양 착각하고도 남을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범죄를 유발한 게 아니라 에덴의 상태를 존속시키기 위한 축복의 도구였다는 게 필자의 분별입니다. 그게 바로 심각한 문제의 근원이요, 부끄러운 입술로는 미처 다 형언하기 어려운 요체였다고 생각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41호)에는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 인간의 내면을 주시하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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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4
  • [세상사는 이야기]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천상의 계시를 의심하다’ (2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먼저 뱀에게는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있는 동안 흙을 먹을 것이며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시고, 하와에게는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여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시고, 아담에게는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들어야 하며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다는 형벌을 패키지로 내리십니다. 이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여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하고,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거라고 무섭게 예고하십니다. 아뿔싸, 자범죄(自犯罪)의 대가는 던져진 주사위처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애통하게도 돌이킬 수 없는 원죄의 족쇄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겪은 원죄의 상황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할 때 마음속으로 따먹은 선악과는 과연 없나요? 솔직히 누구도 자유롭지 않을 겁니다. 남몰래 감춰놓은 죄의 찌꺼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을 테니까요. 가령 십계명을 들어 하나씩 살펴보아도 매일 몇 개씩은 어기고 살지 않나요? 가령 자식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하나님보다 위에 두는 게 있다면 제1계명을 어긴 겁니다. 실제 형상이 아니어도 마음속에 버리지 못하는 우상단지가 있다면 제2계명도 어긴 겁니다. 혹여 은연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팔지는 않았나요? 어쩔 수 없이 주일성수를 빼먹은 적은 없어요? 그밖에 부모님의 속을 썩인 일, 화가 치밀어 나도 모르게 살기를 품은 일, 배우자 모르게 연인을 그리워한 일, 공적인 영역을 사적으로 이용한 일, 작게라도 거짓을 고한 일, 남의 것을 탐낸 일 등이 죄다 십계명을 어긴 사례들이잖아요. 알게 모르게 지은 죄의 실상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이 다 원죄로 인한 죄성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연일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맞닥뜨린 상황보다 몇십 배는 더 유혹이 많지 않습니까? 세상이 그만큼 복잡해졌고 갈수록 살기 어려운 가계 사정도 한몫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해서는 안 되잖아요? 종말에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이웃을 위해 얼마큼 양보했고 얼마나 손해를 감수했는지 예수님께서 물으실 테니까요. 요즘 거세게 불어닥친 투기 바람만 해도 그렇습니다. 터무니없이 오른 집값으로 인해 돌아온 사회적 폐해가 결국 누구에게 되돌아오고 있나요? 청년세대의 희망을 빼앗고 세금이 오르고 물가 앙등으로 도처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거기에 원인을 제공했다면 하늘에서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가 뼈아프게 회개할 지점인 것입니다. 가느다란 죄에 대하여 민감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이 아닌 나의 치부를 먼저 들여다보는 눈길이 신행일치로 가는 길목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니까요. 물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대충 살아도 되고 적당히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말씀은 아니잖아요? 선악이 맹렬히 충돌하는 곳에서 과감히 용기 있게 돌아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개야, 네가 참으로 정직한 자로구나!”라고 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 겁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만일 그때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사탄의 속임수에 말려들지만 않았다면 인류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상상할 때가 있답니다. 나아가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권할 때 아담이 거절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상상하다가 고개를 흔든 적도 있답니다. 우습게도 그들이 범죄에 노출되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부리는 천사를 보내 냉큼 돌아서게 했거나 “네 이놈, 지금 무슨 짓이더냐?”하고 크게 나무라셨던들 인류 최대의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나 되뇌면서 부질없이 상상할 때가 있다는 푸념입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저의 자유로운 사고의 비통사적 영역일 뿐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40호)에는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 지상의 본분을 망각하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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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7
  • [세상사는 이야기]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태초의 축복을 방기하다’ (1회)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신묘막측한 우주의 시작을 알리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태초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주제는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신 하나님”입니다. 창조주께서 최초의 인간 부부를 위해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선물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삼위의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축복하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고,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라고 하시며 다만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당부의 말씀을 주십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하와하고 아담이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차례로 죄를 짓는 장면과 하나님의 추궁에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아담은 학습 과정조차 생략한 채 각 생물들의 이름을 지을 만큼 총명했으며, 돕는 배필로서의 하와는 흙이 아닌 본차이나로 만들어졌지만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자유의지에 의한 자범죄의 결과는 지상낙원에서의 추방이었습니다. 위에서 눈에 띄는 의문점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애초에 사람이 죄를 짓도록 설계하셨느냐는 것과 왜 남자는 흙으로 만드시고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오게 하셨느냐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산 중앙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를 심어 그 열매를 따 먹게 하신 의도는 무엇이며, 처음부터 남녀를 동시에 만들지 않으시고 굳이 시차를 두어 창조하셨느냐는 의문도 듭니다. 물론 근원적으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마는, 최초의 인간이 저지른 잘못으로 말미암아 자자손손 원죄의 사슬에 묶여 신음하는 상황은 너무 가혹하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손을 대지 않을 것으로 가정하고 그렇게 정하셨느냐는 질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으로서 왜 꼭 그래야 하셨는지를 알고 싶은 겁니다. 어찌 보면 그토록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들로 인해 호사가들의 불가지론(不可知論)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평택시 대추리길에 피어있는 옥잠화 또한 뱀으로 둔갑한 채 슬그머니 정체를 드러낸 사탄의 존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 옵션은 처음부터 말씀도 안 꺼내셨잖아요? 이렇게 엄청난 괴물이라면 여러 번 설명하시고 사악한 영물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극히 조심하라고 다짐을 받았어야죠. 이건 일종의 계약 위반 아닌가요? 그것이 저희로서는 못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못된 존재를 내버려 두시고 천지를 창조하셨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도전장을 내민 귀신들을 언제까지 보고만 계실 건가요?” 여러분도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탄의 말에 하와가 속아 넘어간 것도 어리석지만, 남편으로서 중심을 잡아야 할 아담의 태도는 또 뭡니까? 가장으로서 줏대가 없이 행동했다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습니다. 하와가 사탄과 말을 주고받을 때부터 단호히 대처하지 못한 잘못이 크다는 겁니다. 옆에서 방관하다가 방조하듯 부화뇌동했잖아요. 두고두고 아숩고 안타까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둘 따지고 보면 겁도 없이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말을 보태지를 않나, 죽을까 하노라 했다고 흐리멍덩하게 반응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간교한 마귀의 수법이란 게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확실한 내용을 흐트러뜨려 흐릿하게 만들잖아요. 하긴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와에게 정확히 전했는지도 의문이긴 합니다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이제 수습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처도 가관이었죠. 일단 죄성이 온몸을 제어하니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긴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실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지은 죄를 추궁하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그 여자 때문이라고 가당찮은 핑계를 댄 것입니다. 이에 뒤질세라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다고 둘러댑니다. 하루아침에 마귀의 종노릇하는 모양새로 전락해버린 꼴이었습니다. 이것이 죄로 물든 세상의 숨길 수 없는 실상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9호)에는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 천상의 계시를 의심하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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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30
  • [세상사는 이야기] 서울 나들이 ‘천변을 가로지른 산책’ (하)
    아닌 게 아니라 겉모양만 보면 누구라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요컨대 ‘청계8경’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이러했다. ‘청계광장’을 지나 ‘광통교’에서 벽에 새긴 ‘정조반차도’를 감상하고 나니 문화의 벽에 펼쳐놓은 ‘패션광장’이 우리 부부를 맞는다. 추억어린 ‘빨래터’를 뒤로하고 2만여 시민이 동참한 ‘소망의 벽’에 이르러 하늘물터에 세운 ‘존치교각과 터널분수’를 보노라면 그 기교와 정성이 가히 놀랄 만하다. 그러나 정작 내 눈을 사로잡은 곳은 ‘버들습지’. 모름지기 천변풍경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다. 인파에 섞여 징검다리를 건너다 마주친 송사리 떼와의 만남이 이를 오차 없이 증명했다. 그밖에 귀여운 분수를 보는 맛도 심심찮았고, 샛강과의 조우 또한 즐거웠다. 상주인구 천만을 헤아리는 거대 도심에서 이만한 산책길을 걷기는 쉽지 않으니까. 이게 바로 서둘러 인공하천으로 복원한 이유였으리라. 듣자니 하버드대학교 부동산학과에서 이곳 사례를 연구과목으로 개설했단다. 다만 괄목할 만한 성과임에는 분명해 보이나 다소 과장한 듯한 찬사는 여기까지. 이제 곰곰이 왜 자연 하천을 조성할 수는 없었는지 차례로 따져볼 일이다. 차제에 이따금 옛 고향에 출몰하는 슈퍼 쥐들의 정체에 대해서도 추적할 대목이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보니 줄잡아 7~8Km는 넉넉히 걸은 것 같았다. 약 두 시간여 2년 3개월(2003.7.~2005.9.)에 걸친 대역사의 현장을 밟아온 참. 하긴 청계천 복원을 마친 직후에는 매스컴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명물이라는 호평 일색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방문객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을뿐더러 여러 나라에서 필수 관광 상품으로 꼽는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언뜻 더없이 반가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난공사 현장에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숨은 희생자와 공로자들이 있었다. 그에 더해 오랜 기간 이곳을 터전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소시민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흔쾌한 협조가 없었던들 이처럼 빠른 기일에 완공하기는 어려웠을 터다. 하지만 수많은 상인들에게 약속한 갖가지 경제 대책은 일순간에 허공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자살자가 속출했고 아직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최종 책임자는 누구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어찌 되었든 청계천은 야경이 장관이라는데 밤늦게까지 남아 죄다 보고 갈 수는 없었다. ▲ 청계천 <출처 = 성동구청 홈페이지> 천변 벽면의 검은 돌판에 새긴 깨알 같은 명단이 보였다. 청계천 복원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헤아리고 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잘난 시장을 빼고는 모두가 가나다순. 이 또한 긍정적인 측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대변하는 일면인 데다가 새삼 설계자의 미래지향적 마인드가 돋보인 연출이니까. 막바지에 들른 청계천문화관. 청계천 주변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놓은 기념관이었다. 친절한 도우미에게 상세한 안내를 받으며 불현듯 떠오른 게 있었다. 소설가 박태원의 ‘천변풍경(川邊風景)’의 줄거리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1930년대 후반 발표한 장편소설로 50개의 절로 나눠 70여 명의 등장인물이 펼치는 파노라마인데, 일제 중산층과 소시민의 생활 모습을 그린 피카레스크식 구성의 세태소설이라는 요점을 간추려 다뤄주었다. 저만치 못내 미련이 남은 ‘서울숲’일랑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다리가 몹시 아프기도 했으나 너무 늦은 시각에 퇴근하는 무리에 뒤섞인 채 귀가하기는 더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보고 가려던 황학동시장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곧잘 안다고 장담하던 아내마저 뇌리에서 까맣게 멀어진 줄을 알아차리지 못한 터. 그 언저리를 맴돌다가 그냥 돌아서려니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왔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간신히 상왕십리역사를 찾았고 국철을 이용해 천안행 급행이 서는 역에 내렸다. 그나마 남은 먹거리가 있어 출출한 기운을 달래준 건 퍽 다행한 일. 단팥빵이랑 귤이랑 남은 계란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서울에 오면 도심이든 지하철역이든 하등 주위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극히 서민적이면서 한편 서구적이랄까. 어디서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는 늘 소중하다. 열차가 출발하고 고대 빈자리가 생겨 눈을 붙이니 어느새 낯익은 시가지. 택시를 타고 아파트 현관에 내린 시각은 저녁 7시경이었다. 당신과의 외출은 늘 행복하다는 지어미의 입말에 달떠 지아비 손으로 차린 저녁 밥상. 아침에 먹다 남은 북어 무국이 언 속을 풀어주었다. 서울에서 묻은 미세먼지를 깨끗이 씻어내고 감사예배를 드린 뒤 잠자리에 누우니 오늘따라 보금자리가 한결 보드랍고 아늑하구나.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8호)에는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 태초의 축복을 방기하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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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3
  • [세상사는 이야기] 서울 나들이 ‘허파와 같은 용산공원’ (중)
    정리하면 계산상 약 9만여 평의 대지에 연면적(延面積)이 그 40%를 넘는다니 한나절 만에 샅샅이 돌아볼 수는 없었다. 응당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선인의 정신이 깃든 문화유물을 한눈에 알아보기 어렵다면 자주 오는 수밖에. 하긴 내게 이렇다 할 역사적 식견이랄 게 없으니 애초에 상식 수준에서 가볍게 일별해볼 심산이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맘속 깊이 새겨둘 만한 보배가 딱히 짚이지 않아 씁쓸했다. 두리번거리던 고개를 냉큼 돌려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웠기에 텅 빈 공간을 채울 만한 뭔가가 절실했다. 차분히 살펴보니 눈길이 가는 게 하나 있기는 했다. 남달리 아는 바가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옛 돌탑을 볼 때면 자꾸만 시선이 머무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앞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잠자는 의식을 일깨우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런 소외된 지점에 입각해 전국에 난립한 군소 박물관들의 운영 전반에 대해서도 세부적인 기준을 마련할 때라고 본다. 마치 명승지나 관광지 어디를 가나 똑같은 기념품을 닮아가서는 곤란하다는 고언이다. 육중한 덩치의 박물관을 나와 그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틈날 때마다 장외교육을 권장하는 입장에서 혹여 한둘이라도 스칠까 기대했던 제자들의 자취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바쁜 수험생들의 현주소를 애써 외면한 참이다. 그때 남산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인공호수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긴 다음 각종 석탑으로 장식한 뜰을 지나 ‘용산가족공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산뜻한 산책로. 푸르른 잔디가 싱그러웠다. 단 정겨운 우리 금잔디는 아니었다. 잔디가 햇살에 반짝였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원래는 미8군 골프장이었단다. 부디 인간의 발길에 사라지지 않고 잘 자라나야 할 텐데. 어쨌거나 흔치 않은 풍광. 작은 연못에 오리가 노닐고 조각품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냈다. 현장학습을 나온 유치원생들이 종달새처럼 재잘거렸다. 하지만 거대한 서울의 천만 시민들이 맘껏 쉬기엔 턱없이 비좁은 공간이다. 머잖아 주한미군 부대가 거지반 옮겨가면 그 전역을 도시공원으로 꾸민다니 기대치가 크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능가하는 자연친화형 생태공원으로 거듭나기를 학수고대해 마지않는다. ▲ 서울에 소재한 용산가족공원 둔덕에 자리한 태극기공원에 뜬금없이 초병이 서있었다. 바로 옆 담장 너머에 미군 막사가 있는 줄을 미처 몰랐던 터. 모쪼록 이 기지마저 통째로 이전한다면 서울시민을 살리는 허파의 기능은 보다 건강해질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 부부가 사는 평택지역이 주한미군의 총 집결지렷다. 대신 정부에서 특별법을 정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특별교부금으로 힘껏 달랜다고는 해도 자신이 사는 곳이 군사기지화하는 걸 달갑게 여길 시민은 드물다. 그로 인해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서는 현실을 코앞에서 목도하는 자로서 민족 분단의 처지를 마냥 슬퍼할 수도 없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잃고 어디론가 밀려나야 하는 농민들의 처지를 보노라면 적잖이 딱하고, 신도시가 생겨 기존 도심이 정비되면 교육여건이 나아진다는 말에 뭐라고 선뜻 의견을 낼 형편도 아닌 듯하다. 이왕지사 미군 주둔이 필요악이라면 중지를 모아 풀어갈 현안이기에 뾰족한 수는 없지 싶다. 그래서일까?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갑자기 쌀쌀하게 다가왔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아내가 안쓰러워 일단 양지바른 곳을 찾아 나섰다. 삶은 달걀과 과일로 허기를 메우고 나니 냉기도 조금은 덜했다. 시계를 보니 다음 행선지로 향할 시각. 서둘러 일어나 발길을 재촉했다. 종각역에서 내리니 곧바로 영풍문고. 국내 2위 업체라지만 바로 옆 교보문고에 비하면 아담한 규모다.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잠시 둘러본 뒤 옥빛 대리석 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청계천의 풍경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한쪽에는 정부의 농산물 개방을 반대하는 대형버스 행렬이 세종로를 가로막아 섰다. 이름도 낯선 시점광장. 천변을 축약한 물줄기가 과거와 현재를 담아 미래를 향해 상징처럼 흐르고 있다. 비록 자연 하천은 아닐지언정 설계는 퍽 예술 지향적이다. 벽천을 타고 내리는 폭포를 따라 들뜬 기분으로 걷기를 시작했다. 그간 복개한 이래 시궁창에 불과했던 걸 감안한다면 이만치 맑은 개천을 만든 것에 대해선 점수를 후히 주고 싶다. 버들강아지에 물풀이며 갈대에 담쟁이덩굴이라니 놀랍기 그지없다. 게다가 어제와 오늘을 교묘히 조합해 놓은 발상도 찬사를 베풀 만하다. 적어도 나의 첫인상은 그랬다. 예기치 않게 불거진 여러 문제점을 애써 차치하고서 청계천의 가까운 장래를 접어놓고 보자면 결단력 있는 시도로 보아도 무방할 듯해서였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7호)에는 ‘서울 나들이 - 천변을 가로지른 산책’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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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6
  • [세상사는 이야기] 서울 나들이 ‘박물관과 녹지의 만남’ (상)
    벼르고 벼른 끝의 서울 나들이. 다소 늦은 아침나절, 지하철 출근 인파를 피해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오늘의 주제는 중앙박물관 관람 및 공원과 천변 산책. 마을버스에서 전철로 연계한 요금 체계의 혜택이 생각보다 쏠쏠했다. 그간 지근거리에서 바라만 보고 있다가 목하 서울로 가는 새로운 교통편을 체득할 기회를 잡은 셈이다. 실제 피부에 와 닿은 승차감도 꽤 괜찮았다. 때가 때인지라 얼마큼 예상은 했으나 의외다 싶을 만치 승객이 적었다. 하지만 수원에 이르니 상황은 정반대. 순식간에 북적이는 차창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게다가 벌써 오래전이로되 탈서울 뒤 해마다 몇 차례씩 향경(向京)할 때면 새삼 언짢아지는 게 있었다. 우리네 차창 풍경은 왜 이 모양일까? 굳이 희뿌연 하늘을 뒤덮은 아파트단지를 실례로 들지 않더라도 푸른 산맥을 뭉개고 중구난방으로 지어댄 건물들을 보면 심란하다. 난개발에서 주요인을 찾을 수 있겠다. 지금이라도 풍광과 어울리는 지붕 형태를 디자인하고 벽면 색깔만 통일해도 웬만한 그림은 나올 듯한데 왜들 미적거리는지? 혹여 경제선진국 진입에 걸맞은 문제 제기는커녕 문제의식 자체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전문가들이 지혜를 모은다면 볼썽사나운 대한민국의 풍경화를 확연히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연신 나타나는 후줄근한 상가 및 주택가. 너저분하고 지저분한 구석도 이따금 끼어든다. 대략 한 시간 반 만에 이촌역에 내리니 ‘국립중앙박물관’. 1909년 11월 창경궁 안에 이왕가박물관으로 개관한 이래 1915년 12월 총독부박물관을 거쳐 해방 후 1945년 12월 독립 박물관이 되었다가 몇 군데를 오가며 전전한 끝에 2005년 10월 28일 경복궁 시대를 마감하고 드디어 용산시대를 열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건물의 격조를 높여주리라 기대했던 외양과는 거리가 멀다. 이왕이면 전통 한옥의 우아한 자태를 살려 지었으면 좋으련만, 신축한 건조물의 겉모양은 아무리 뜯어본들 별다른 의미조차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어정쩡했다. 덩치로만 친다면야 세계 여섯 번째 규모라지만 그 위용마저 별로인 터에 다행히 시멘트에서 풍기는 칙칙함을 주위의 섬세한 조경이 조금은 감싸주었다. 다만 유독 공공장소에만 오면 흐트러지는 무질서의 고질병. 왜일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람들로 붐비는 건 반가운 일임에도 나이가 들수록 그런 모양새를 참아내지 못하는 건 나의 못된 성정 탓일 게다. ▲ 국립중앙박물관 외경 1층 상설 전시장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해지기 전까지 둘러볼 빡빡한 일정이 핑계였다. 압권은 중앙에 자리한 ‘경천사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개인적으로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박물관다운 전시물로 여겨졌다. 첫 전시관은 고고관. 그런데 입구에 걸어놓은 연표의 좌우가 뒤바뀌어 있었다. 직원에게 문의하니 동선을 거슬러 거꾸로 들어왔으니 시선을 역으로 돌리는 불편함쯤은 감수하란다. 아무튼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와 초기 철기를 거쳐 원삼국부터 신라시대까지 일사천리로 훑고 지나갔다. 평소 궁금해하던 발해는 바로 옆 역사관에 있었다. 거기서 가장 관심이 가는 곳은 금석문실과 한글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인 상정고금예문의 우수성과 우리 한글의 탁월함은 변함없이 빛났다. 2층의 미술관에서는 서예실이 눈에 띄었고, 3층 회화실에서는 도자보다 금속공예에 눈길이 갔다. 아시아관에서는 단장을 마친 인도네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낙랑유적과 신안해저유물이 관람객을 모았다. 잠시 앉아 창밖 경치를 감상하며 쉬다가 발길을 옮기니 기증 유물들의 배치는 일목요연하지가 않았다. 그 가운데 걸음을 멈춘 곳은 일본인에게서 되돌아온 수집품들. 하나하나 살펴보니 절로 마음이 숙연해졌다. 늘 그렇듯이 문제는 형식보다 내용물에 녹아있다. 총 33만 점의 국보급 유물에도 불구하고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비해 전시물이 빈약해 뵈는 건 나만의 시각일까? 매사 외식(外飾)을 경계하라는 선현의 가르침과는 다른 차원의 인식. 아내 역시 그리 탐탁한 눈빛은 아니었다. 전국 어디를 가나 천편일률적인 배치도라면 그야말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영국박물관이나 루브르와 견주자는 얘기는 아니다. 남의 물건을 훔쳐다가 제 물건인 양 으스대는 꼴불견보다는 문화 국민의 자긍심과 자존감을 떳떳이 지키는 일이 몇 갑절 가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간송 전형필 선생이 그립다. 그처럼 해외를 떠도는 골동품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일에 정책 당국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나아가 실력 있는 큐레이터를 양성하고 편리한 부대시설과 주변 경관의 조성 등에도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6호)에는 ‘서울 나들이 - 허파와 같은 용산공원’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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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9
  • [세상사는 이야기]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선한 마음의 겨울’ (4회)
    벌써 때 이른 첫눈이 내렸습니다. 새하얀 눈으로 덮인 세상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러구러 어느덧 올해도 다 지나갑니다. 겨울 편지에서는 “인간의 원죄”에 대하여 깊숙이 들여다보렵니다. 아시다시피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적에는 죄가 없었지요.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각종 실과를 따먹으며 영생을 누리도록 창조하신 피조물이었으니까요. 아담은 영특했고 한동안 본분에 충실했습니다. 온갖 동물에게 이름을 붙여줄 정도(창 2:19)였어요. 실로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지상의 어느 학자도 그만큼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 못했잖아요.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달란트를 십분 활용한 결과였습니다. 아름다운 에덴동산은 한동안 그렇게 지극히 평안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담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23)이라고 좋아하던 하와 앞에 뱀의 형상으로 둔갑한 사탄이 나타납니다. 코앞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로울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를 범하라고 유혹했어요. 물론 간교하게 포장한 거짓말(창세기 3:1~6)이었죠.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창세기 2:17)을 불행히도 최초의 부부는 어기고 맙니다. 그 대가는 영적 죽음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상태에서 속이고 감추는 짓은 일상이 되었지요. 가당찮은 핑계를 대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창세기 2:17)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터입니다. 자범죄로 인해 죄인이 된 게 아니라 이미 죄로 물든 죄인(시편 51:5)인고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삼위의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심으로써 우리의 죄 짐을 지고 돌아가셨기에 구원을 받은 현장이 생생히 다가오는 대목입니다. 감읍하게도 생령으로 지으셨기게 자유의지를 선물하셨습니다. 매일 죽어야 한다(고린도전서 15:31)는 과제를 주신 참이죠. 자유의지는 온전히 내게 맡기신 권한이니까요. 착오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해서 당장 무슨 징계가 따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전능자의 은혜를 오용하며 살지요. 엄연한 창조 사역을 믿지 않을지라도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로마서 8:26)하시며 마침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 큰 사랑을 모르는 건 뿌리 깊은 불신앙 때문이지요. 죄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자신의 잘못이 보일 리 없으니까요.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영생의 약속을 받은 성도보다 더 행복한 일생은 없습니다. 가까이 상생 정신을 실천할 공동체에서 싸움이 계속되는 원인은 자명합니다. 바로 ‘이기적 유전자’ 때문입니다. 한때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도킨스의 주장과는 세계관이 다릅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범죄의 속성이 고스란히 자자손손 유전된 참이니까요. 불순종의 인자가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히는 형국입니다. 감히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이 자기 자신을 우상화한 죄악이지요. 인간은 높아지면 반드시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이유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달란트를 소명에 쓰고 나면 그 얼굴을 주님의 옷자락에 깊숙이 감춰야 하거든요. 물거품 같은 공명심에 연연하다가 형편없이 추락한 사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라는 바울의 고백(고린도전서 3:6-7)을 마음 판에 새기십시오. 사람은 참으로 미약한 존재여서 자기애를 껴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굳이 상처의 원인을 찾는다면 영적인 질환이 첫째요, 육적인 환부는 태만일 가능성이 짙습니다. 꼭두새벽부터 오밤중까지 백날 말씀을 듣고 읽어도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않으시니까요(시편 66:18).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우미 역을 자임할 여건을 마련할 의무가 본인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거의 모든 인간사가 서로의 필요는 주고받는 법칙을 벗어나기 어렵거든요. 상대가 장애를 가졌다면 더욱 신중히 접근해야 합니다. 도움을 청하기 전에 지레 선심을 쓰듯 말하고 행동하면 곤란합니다. 느긋이 기다려주며 최대한 이해하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합니다. 마지못해 돕는다면 감정을 상할 뿐이지요. 이해와 배려를 통해 서로 사랑할 때 오래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향해 주님께 하듯 진심을 다하는 게 복음입니다. 소외된 분들이 이룬 공동체를 힘써 돕되 우리는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야고보서 4:14)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5호)에는 ‘서울 나들이 - 박물관과 녹지의 만남’이 이어집니다.
    • 시민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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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7
  • [세상사는 이야기]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선한 마음의 가을’ (3회)
    한여름 맹위를 떨친 불볕더위에 다들 평안하셨는지요? 그래도 입에 들어올 알곡이며 열매를 이만치 허락하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난번에는 ‘십계명’을 주제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지요. 험난한 생활 현장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올곧게 살아가는 길이 녹록지 않기에 우리는 더욱 말씀을 궂게 붙잡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사람은 왜 배워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이는 단순히 상급 학력을 쌓아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은 온통 일류대학을 나오기 위해 전쟁과 같은 입시를 치러내는 일에 몰두하지만 믿음의 형제자매들은 배우는 목적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드러내는 데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세계를 슬기롭게 살아가는 지름길입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에 각 학과목을 중심으로 다양한 학문의 구성 원리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저는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한글의 음운 체계에 대해 새삼 놀라곤 합니다. 자음(닿소리)과 모음(홀소리)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참으로 오묘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그 주역은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입니다. 자음은 발음기관(혀, 입술, 이, 목구멍)을 본떠 초성과 종성을 만들었고, 모음은 우주의 주요소인 천지인(天地人)을 본떠 중성을 이룸으로써 생생한 소리글자를 생성해냈습니다. 세계에서 현재 사용하는 수천의 언어 가운데 육하원칙에 답할 만큼 창제원리가 분명한 문자는 한글뿐입니다. 유엔에서 해마다 문맹 퇴치에 기여한 단체나 개인에게 수여하는 상의 이름이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UNESCO King Sejong Literacy Prize)’인 것만 보아도 그 위상을 충분히 알 수 있지요. 훌륭한 리더를 중심으로 이뤄낸 걸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조촐한 글을 써서 발표하는 문인으로서 우리말을 쓸 때마다 깊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거지반 자생적이로되 외국어도 별반 다르지는 않습니다. 물론 지구상에 익혀야 할 언어가 여럿이어서 누리는 이점도 있긴 합니다. 수많은 일자리가 생긴 터입니다. 까다로운 언어 습득의 관문을 통과한 이들이 누리는 복락이지요. 에덴에서 하나였던 말이 갈라진 까닭은 이렇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 회개를 통해 거듭난 줄 알았던 인간들은 끈질긴 원죄의 사슬을 끊지 못한 채 불과 얼마 가지 않아 하나님을 대적하기에 이릅니다. 곧 바벨탑 프로젝트였지요. 다시는 물로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언약을 불신했기에 대대로 거처할 성을 하늘 높이 쌓아 심판을 피해 보자는 심산이었지요. 너나없이 피해망상증에 걸린 영적 중증 환자였던 셈입니다. 차후에는 불 심판을 예고하셨는데도 말입니다. 현재 영어 공부에 매달려 골머리를 앓는 원인이지요. 분명히 기억할 일은 우리가 천국에 가면 태초 주셨던 하나의 언어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수학의 세계는 더욱 논리가 정연합니다. 예컨대 복잡다단한 방정식을 왜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을 발견하는 훈련과정이 수학이니까요. 창조 법칙을 찾아보라는 퀴즈요 보물찾기입니다. 자연과학이나 응용과학도 같은 줄기입니다. 이를테면 제아무리 위대한 수학자라고 해도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계획을 겉핥기로 하나둘 찾아낼 때마다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것처럼 기뻐 날뛰는 모양새지요. 그 가운데 가장 신묘막측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아직 전능자를 만나지 못한 유명 의사나 과학자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 뛰어난 머리로 평생 인체를 연구하고 우주를 탐구하면서도 모든 게 저절로 생겨났다고 우기니 말입니다. 이른바 ‘우연과 추정’을 남발하며 ‘오랜 세월’을 무기 삼아 무작정 버티자는 형국이지요. 온갖 보화의 원천은 삼위의 하나님밖에는 안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나 예체능 과목도 똑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로 응용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구의 자전(비행기 속도의 약 두 배의 시속)으로 인해 낮과 밤이 생기고, 지구의 공전(자전의 약 64배의 시속)으로 인해 사계가 바뀌는 걸 보십시오. 게놈(genome)이란 게 무엇입니까? 초월자에 의한 사람의 설계도 아님니까? 눈앞에서 창조주의 사역을 확인하고도 믿지 못하는 바는 전적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탓입니다. 시와 때를 따라 열심히 공부하는 까닭은 바로 창조세계를 올바로 알아나가기 위해서지요. 전 과목을 다 잘할 수는 없되 보다 흥미로운 분야를 찾아 선하게 활용하도록 도울 책무가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막중한 사명이요 사역입니다. 만만찮은 조건을 극복하고 창조주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에 매진하시길 기도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4호)에는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 선한 마음의 겨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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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세상사는 이야기]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선한 마음의 여름’ (2회)
    지난해 화덕을 방불한 땡볕을 떠올리면 벌써부터 심란해집니다. 사실 사계절이 인체에 미치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돌이켜보면 이게 다 에덴에서 저지른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았지요. 게다가 노아 시대 관영한 죄악으로 인해 홍수 심판까지 자초했으니까요. 미증유의 대사건을 겪은 뒤에는 어떠했나요? 뼈저린 회개는커녕 온갖 탐욕으로 얼룩진 삶이었잖아요. 극심한 지구온난화야말로 그 증거랍니다. 그나마 일반은총으로 살 만하던 세상이 이토록 각박해져 버렸습니다. 다소 무거운 얘기로 마음 카페의 여름을 연 만큼 이번 편지에서는 특별계시인 “십계명”에 관해 살펴보렵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한 최소한의 생존법이니까요.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열 가지 계명은 속박이 아니었습니다. 흔히들 율법이라면 자유의지를 억압한다는 선입견이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을 지키면 축복의 길이요, 어기면 환난의 연속이라는 걸 알면서도 죄를 지었거든요. 그간 창조주의 말씀을 무시한 만용을 곰곰이 들여다보자는 겁니다. 십계명은 크게 신을 향한 4개의 ‘대신 계명’과 사람에 대한 6개의 ‘대인 계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삼위의 하나님은 천지에 유일하신 분입니다. 교주를 섬기는 세상의 종교들은 단지 그 형태를 띠고 유혹할 뿐이지요. 잡신과 교리와 신도를 갖추고 말입니다. 참고로 석가모니 역시 사람이었기에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었지요. 사도행전 4:12절을 통해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니까요.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내친김에 천주교 십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저들은 제2계명을 아예 없애버린 뒤 엉뚱하게 제10계명을 둘로 쪼갰습니다. 9번째에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와 10번째에 ‘남의 재물을 탐치 말라’로 명시했더군요. 마리아에게 절하기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감행한 거죠. 온전히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뤄진 성경에 칼질을 했습니다. 죽은 자를 복자로 세우고 성인으로 추앙하며 각종 성물을 만들어 복을 비는 행위는 단지 우상숭배에 불과합니다. 셋째 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교계에서 파악한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참칭하는 자들의 숫자가 무려 100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지옥의 무서움을 모르고 벌이는 망발이지요. 무심코 하나님께 서원하는 일도 이 범주에 속합니다.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창조주께서 엿새를 일하시고 이레째는 쉬셨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킨다는 말씀입니다. 다섯째부터는 인간사회에 필요한 법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단 주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을 벗어난 길에 동조하면 함께 망합니다.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법이지요. 일곱째는 “간음하지 말라”. 예수님은 여인을 보고 품는 음심마저 나무라셨지요. 여덟째는 “도둑질하지 말라”. 마땅히 공적인 물건을 사적인 데 사용하는 관행마저 삼가야죠. 아홉째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다들 체감하듯이 거짓말은 순식간에 번지니까요. 열째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덧붙일 말이 궁색한 대목으로 눈엣가시 같은 사람을 내 몸과 같이 품으라는 경계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3호)에는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 선한 마음의 가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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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2
  • [세상사는 이야기]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선한 마음의 봄날’ (1회)
    때 이른 봄꽃들이 이제 막 몽우리를 터뜨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예수님의 보혈로 새롭게 싹을 틔웠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이번에는 “믿음과 행함”에 대해 집중적으로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믿음은 삼위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을 가리킵니다. 행함은 그 믿음에 따라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말하고 실천하는 힘입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즉 보혜사(保惠師)를 말합니다. 창조주는 세 분이지만 동시에 한 분이라는 의미에서 삼위일체(Trinity)라는 신학 용어를 사용하지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즉 독생자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은 하나님이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낳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사람의 이름이나 어떤 낱말 앞뒤에 ‘갓-’ 또는 ‘-의 신’을 붙여 부르는 유행은 심히 우려스러운 풍조입니다. 성삼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문제는 발단은 믿음과 행함의 불일치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삼위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 채 교회에 드나듭니다. 참다운 신앙이 생길 리 없습니다. 깊은 믿음이 없으니 행실에 균열이 발생합니다. 물론 보이는 행동이 바르다고 하여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자는 아닙니다. 세상의 윤리도덕과 준법정신을 따라 얼마든지 올곧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위한 고도의 절제일 뿐 사람의 영혼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응당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알 리 없습니다.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간구로 시시각각 돕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릅니다. 스스로 추구하는 의로움은 한순간에 무너지는 사상누각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창조주를 향한 신의식이 없는 한 세상의 가치 체계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는 영적 논리입니다. 그렇다면 신행일치의 앞뒤는 자명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으면 행위는 자연스레 따라간다는 원리입니다. 언행일치 뒤에 신행일치를 이루는 게 보통이지만 믿음이 생긴 후 행함에 커다란 변화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줄기차게 교회는 다니는데 행실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실제 믿음을 갖고 있는지 점검해볼 일입니다. 이른바 믿는 척하며 교회당의 마당만 밟고 다닐 확률이 높기에 그렇습니다. 이 경우 본인이 잘 알겠으나 착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스스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지 들여다보면 됩니다. 양심을 속이는 자는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기보다는 사리사욕에 얽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생적으로 원죄를 안고 사는 인간이기에 이중적 행태를 포장하며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불행한 일이로되 세상이 어지러운 건 그래서입니다. 이런 지적을 두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더군요. 왜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분별의 영역입니다. 잘못된 사안을 바로잡기 위해 갖가지 법률을 제정하는 것처럼 성경 말씀이라는 잣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는 십계명이라는 율법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로 알려주신 말씀을 무시하는 자를 보고 어떻게 성도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뿐더러 하나님을 모르면 분별력이 흐릿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만드신 분이 삼위의 하나님이니까요. 단순히 오욕칠정의 속성이 아니라 그걸 마음속에 품고 죄악을 키우는 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니 불의를 보고 분노하고 바로잡겠다는 자유의지의 발로는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분은 꼭 필요한 감정입니다.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나설 때 주저앉는 태도야말로 악의 편을 드는 행위에 속하지요. 늘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리 혼탁합니까?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내로남불’ 때문이지요.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 관용을 베푼다면 사회는 한결 깨끗해질 것입니다. 그 일에 앞장서는 공동체가 교회여야 합니다. 내가 싫으면 남도 싫은 겁니다. 내가 좋은 걸 남에게 양보하는 게 실천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덕목입니다. 최대한 그 방향으로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삼위의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먼저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삶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성도의 필수 요소입니다. 가정에서 실천하고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면 복음은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오늘날 명목상의 교인들에 의해 교회로 향하는 뭇 발걸음이 가로막혀 있거든요. 뼈아프게 회개할 대목입니다. 그 사역에 결단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2호)에는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 선한 마음의 여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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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6
  • [세상사는 이야기]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하나의 본보기’ (하)
    필자가 선보이는 성경에 관한 서평은 지면 관계상 신약의 일부를 소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성경은 구약(Old Testament)과 신약(New Testament)이라는 2개의 언약, 즉 구약 성경 39권과 신약 성경 27권(합 66권)의 책 가운데 총 1,189개의 장에 도합 31,173개의 절과 773,692개의 낱말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책들은 약 1500년간에 걸쳐 40명 가까운 사람들이 각각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신약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따르면 모든 성경의 내용은 일개인이 구상한 창작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대표적인 저자로는 구약에서는 모세가 있고, 신약에서는 바울을 들 수 있다. 신약 성경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역사서(사도행전), 바울 서신서(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일반 서신서(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유다서), 예언서(요한계시록)가 그것이다. 신약 성경은 대략 서기 45년경부터 서기 95년경까지 코이네 헬라어(공통 헬라어, AD 1세기 그리스의 일상어의 형태)로 표기되었다. 4권의 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의 출생과 33년간의 삶에 이은 사역 및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크게 충돌하지 않는 네 가지의 기사를 알려줌으로써 예수가 어떻게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인지를 드러내면서 신약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왕으로서의 예수, 마가복음은 종이 된 예수, 누가복음은 인간으로 강림한 예수를 공관복음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고, 요한복음은 창조주로서의 예수를 조명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예수가 가르친 제자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열두 사도는 예수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세상에 파견한 사람들이다. 바울 사도가 쓴 서신서는 특정 교회에 보내는 편지로써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그에 따른 실천 항목을 알려준다. 일반 서신서는 추가적인 가르침과 그 적용으로써 바울 서신서를 보완하고 있다. 사도 요한이 남긴 계시록은 종말 시대에 일어날 사건들을 고도의 상징과 비유적 언어로 예언한 기록이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개관하는 목적은 서양사의 중요한 대목일뿐더러 인문학을 이루는 요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의 실체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유의점은 성경 번역이 애초에 문어체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필자가 보는 개역개정(개역한글 교정본)보다 쉬운 새번역이나 현대인의성경을 권한다. 성경의 창세기를 읽고 적은 독후감은 다음과 같다. “내가 성경책을 처음 접한 때는 취학 전이었다. 엄마를 따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면서 자연스레 자그마한 신약 성경을 손에 쥐었고, 한글을 배워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때부터 조금씩 읽어나갔다. 다소 어려운 창세기의 설교를 듣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한두 해가 지난 뒤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문장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쫓겨났다는 얘기만 반복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로 인해 원죄가 생겨났다는 뜻을 알 리 없었다. 창세기 50장이 모세 오경에 속한다는 설명이나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인명과 지명에 질려 노아 홍수에 얽힌 바벨탑의 숨은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거쳐 애굽 총리가 된 요셉의 일생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뒤돌아보니 성경의 맥을 제대로 짚어준 주일학교 교사는 아예 없었다. 인간은 성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져 원래 영생하도록 만든 존재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참이다. 첫 남자인 아담은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붙일 만큼 지혜로웠다. 그를 돕는 배필로 지어진 여자가 이브였다. 최초의 부부는 완벽한 조건에서 스스로 창조주라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었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금하시며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를 내리신 터였다. 그러나 뒤늦게 깨닫고 보니 이는 축복이었다. 동산 중앙의 그 나무를 볼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어야 했다. 뱀으로 둔갑한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였다. 죄로 물든 부모가 낳은 아이는 유전 법칙에 의해 대대로 죄인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바로 원죄였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1호)에는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 선한 마음의 봄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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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4-28
  • [세상사는 이야기]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서평의 작성법’ (중)
    그렇다면 책을 평가하는 요소에는 무엇이 있으며, 왜 중요할까? 그것은 독자들에게 쓸만한 선택지를 제공함으로써 그 책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다. 서평자에게 해당 책의 가치를 발굴할 책무가 일정 부분 주어진 참이다. 즉 독자에게 책의 조망권을 보장하는 차원이다. 먼저 갈래(장르)와 더불어 제목의 의미를 소개하면 된다. 소재부터 제재를 거쳐 주제로 모아진 제목을 역으로 추적할 필요가 있다. 책의 표제로 내세운 뜻을 추상화의 과정으로 축약한 것이 제목이기에 그렇다. 목차라는 설계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건 그래서다. 차례는 책 전체의 조감도인 셈이다. 그다음에는 책의 내용을 쉽게 요약해주되 머리말, 본문, 마무리를 통해 대주제를 이끌어가는 저자의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 대개는 이 부분에서 작가의 공헌도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은이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면 자연스럽다. 저자의 이력을 통해 전문성을 확인하는 절차 또한 독자들에게는 중요한 지침이니까. 책을 출간하게 된 동기와 배경에 이어 읽기를 권장하는 연령대별 명시 또한 챙겨야 한다. 간단히 출판 사항, 즉 출판사명, 출판 연도, 분량(쪽수), 책의 질적 형태(양장본 여부)를 곁들임으로써 소장을 원하는 이들을 배려하는 일도 자상한 서평의 요건이다. 서평에서 착안할 지점을 꼽으라면 책을 향해 따스한 눈길을 주되 매서운 설득력으로 독자와 소통하는 데 주안점을 두라고 주문하고 싶다. 첫째는 가독성(可讀性)이다. 글이 쉽게 읽힐뿐더러 그 뜻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때 가독성은 높아진다. 시조시인인 필자의 경우 3·4조의 운율미를 충분히 활용하는 편이다. 첨가어인 우리말의 특성상 명사와 조사의 조합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어절이 서너 글자이기에 그렇다. 그만한 길이에서 읽는 이의 호흡은 차분해진다. 그 대목을 가리켜 시가의 운율을 이루는 기본 단위, 즉 음보(音步, 소리 걸음)라고 이른다. 홑문장과 겹문장의 조화 역시 중요하다. 문체의 적합성에 따라 이해도가 달라진다. 간결체나 만연체, 강건체나 우유체, 건조체나 화려체를 선택하는 건 글의 갈래와 내용에 따라 구분할 문제다. 가능한 한 수동태(피동태)는 지양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둘째는 객관성이다. 무엇보다 정확한 내용을 전달할 책임이 평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과장이나 비약을 포함한 왜곡이나 폄훼는 절대 금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는 논리성이다. 호소력 있는 전개라야 독자를 설득해낼 수 있다. 논리를 풀이하자면 전제로부터 결론에 이르는 합리적 과정을 말한다. 논지를 풀어가는 앞뒤에 모순이 없을 때 독자를 끌어들일 힘을 갖게 된다. 넷째는 명확성이다. 특히 어휘의 이중성에 유의해야 한다. 모호한 말은 시적 자유를 제외하고는 허용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누구든지 남달리 획기적인 비책을 바란다면 필자는 대뜸 ‘동어반복 회피의 원리’에 유념하라고 이르집고 싶다. 늘 지시어와 유의어 사용에 인색하지 말고, 자칫 남발하기 쉬운 접속어를 최소화하라는 요구다. 필요할 때 과감히 성분을 생략하는 버릇도 유용하다. 소주제를 중심으로 뭉치는 단락(문단) 구분의 원칙은 같은 생각의 덩어리에 기초해야 한다. 다섯째는 유효성이다. 시종일관 일관성 있는 관점과 해석(비평)의 기준은 일정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전체 주제를 향한 단원별 통일성을 견지하는 게 관건이다. 여섯째는 책무성이다. 근거 있는 비판과 퇴고를 통해 사후의 이의제기에 대비해야 한다. 글을 고칠 때 추가, 삭제, 재구성의 3요소를 익힌다면 완성도는 그만치 올라가기 마련이다. 서평의 서술 방식에서 주어, 목적어, 서술어의 호응 관계를 바로잡고, 표현과 구성의 적합도를 높이는 작업은 맹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가령, ‘책은~읽힌다, 저자는~하고 있다, 주인공은~보인다, 작품은~평가할 수 있다’는 정도면 적절하고, 강(장)점은 ‘~돋보인다, 뛰어나다’, 약(단)점은 ‘~낯설다, 한계로 보인다’는 기술(記述)이면 절제감을 더한다. 구성비율은 저자 10~15%, 조망 20%, 내용 30% + 해석 30%, 추천대상 등 5~10%이면 균형감을 준다. 끝으로 필자에게 효율적인 글쓰기 대책에 관해 조언하라면 매일 아침 가정 예배를 통해 성경을 묵상하고 다독, 다작, 다상량(多商量)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쓰기를 습관처럼 몸에 배게 하려면 매사 기록하며 주제 일기부터 시작하는 게 관건이다. 관심 있는 분야의 꾸준한 독서와 아울러 봉사·견학·여행 등을 통해 글감을 쌓아나가야 한다. 사물을 보는 날카로운 시각과 애정 어린 시선이 글을 잘 쓰는 요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0호)에는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 하나의 본보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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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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